주역과 글쓰기

8.23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8-20 23:33
조회
129
이번 시간 읽은 괘는 화뢰서합(火雷噬嗑)과 산화비(山火糞)입니다. 둘 다 불[火]이 있어서 문명을 연상하게 되는 괘이기도 하지요.
'서합'은 '깨문다'라는 뜻입니다. 괘 맨 위와 맨 아래에 양효가 있고 그 안쪽으로는 네 번째 효 빼고는 모두 음효이지요. 이 네 번째 양효를 어떻게 결단해 제거할까, 어떻게 장애물을 넘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괘가 서합괘입니다. 따라서 괘사를 보면 '옥(獄)을 쓰는 것이 이롭다'라고 나오지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 때, 때로는 그냥 놔둬서 안 되는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쓰는 것은 끊어내고 바로잡는 옥입니다. <주역>에는 여러 문제상황이 나오는데, 그것이 단지 '문제'로 퉁쳐지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는 품고 가야 하지만 어떤 문제는 끊어내고 분질러내는 힘을 발휘해서 해결해야 하지요. 서합 같은 경우는 형벌로 끊어내는 것을 중시합니다.
형벌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바로 원칙입니다. <논어>에는 "형벌이 적절하게 내려지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다(刑罰不中則 民無所措手足)"라고 나옵니다. 형벌에서 원칙이 제대로 서지 않고, 만약 기준이 갈대와도 같다면 그 사회는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그럼 사회 구성원들은 장애물을 그냥 놔두는 것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될 거고요. 그렇다고 장애물을 그냥 놔둘 수는 없습니다. 사회의 이물질은 조금만 있어도 계속 문제가 되게 마련이니까요. 채운샘은 따돌림 문제를 예로 드셨는데요, 어떤 개인이 집단에 섞이지 못하고 맴도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설령 그 사람이 사회에 섞인다 하더라도 다른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끔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면 계속 그 따돌림 문제가 발생할 테지요. 그럴 때는 서합, 이전과 같은 방식의 운영을 끊어내고 완전 다른 조치가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구성원 사이에 '간격'이 남아 서로 합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서합은 음효들 가운데 구사효처럼, 뭔가 하나가 걸그럭 거리면서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그것을 배치 속에서 읽어내야 적절한 해결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괘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주역>이 상정하는 독자는 기본적으로 리더, 군주입니다. 전체를 보고 배치를 생각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만약 이런 사람이 철학이 없다면, 다시 말해 뭐가 中인지 사고하는 판단력이 없다면 그 리더는 그 자체로 집단의 재앙이게 될 것입니다. 서합괘는 그 리더가 어떻게 결단하면 넘치지 않게, 中을 지킬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中이란 뭘까요? 이 괘의 효를 보면 어딜 봐도 '법령을 집행할 때 객관적으로 하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초점은 사회에서 겉도는 사람을 잘 길들여서 합(合)하는 것이지 벌주는 것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를 보면, 힘이 없는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겁만 줘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초구),강한 사람이 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강하게 형벌을 써야 한다고 나옵니다(육이).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약한 자에게는 약하게 하여 그럼으로써 사회 안에서 절그럭 거리는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산화비괘는 토론에서 논란(?)이 많았던 괘였습니다. '꾸밈'이라는 뜻의 이 괘는, 자연스럽게 문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산 아래 불이 있고 그것이 인문(人文)이라고 나오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역을 볼 때 '꼭 이래야 한다'는 것은 없지만 너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때려맞추려고 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명' 하니까 자연스럽게 중요하고 뭔가 화려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산화비괘는 아래에서 산을 비추는 모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위에서 산을 비추는 것보다 훨씬 부분적이게 되지요. 뭔가를 비춘다는 점에서는 서합괘의 옥사보다는 훨씬 떠들썩하고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만, 알맹이 없이 꾸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괘사도 이롭긴 하지만 '조금 이롭다[小利]'에서 그치지요.
문(文)은 가시적인 제도를 뜻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본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요. 경제는 어려운데 계속 환경미화만 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반발을 살 테니까요. 하지만 정돈된 환경도 인간이 사는 데 무척 중요하긴 합니다. 다만 국가나 사회의 본질은 아니죠. 따라서 이 괘가 나오면 무척 미묘하다고 합니다. 정치가가 이 괘를 뽑으면 '문화부장관 정도...?'의 반응이 나온다고 말이죠. 물론 그 자리는 무척 대단하지만 정책 결정을 총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느냐 하면 역시 미묘하죠. 한때 공자는 점을 치고 이 괘를 받아서 무척 한탄했다고 합니다. 천하가 어지러운 때 뭔가 해보고 싶었던 그가 문화부장관 자리에 만족할 리 없었으니까요.
꾸밈의 본질은 바탕이라는 것은 효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가령 이 괘의 주인공은 육이효인데요, '수염을 꾸민다'라고 하지요. 한마디로 아무리 아름답게 기른 수염이라도 얼굴이 꽝이면 끝이라는 겁니다. 수염은 거들 뿐! '패완얼'의 <주역>버전이라고 할까요?
<주역>은 기호의 세계입니다. 대단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지요. 일종의 코드입니다. 해설서가 있지만, 우리가 읽는 정이천의 주도 생각해보면 1000년 전의 말입니다. 본문이라 할 수 있는 효사들은 더욱 감을 잡기 어렵게 생겼지요. 따라서 이 기호들로 이루어진 코드를 우리는 우리 말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음과 양의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헤매는 우리에게 언어를 주는 분야가 바로 서양 현대철학입니다. 문제는 이건 우리 시대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죠@_@
시몽동은 모든 것은 에너지적 상태라고 합니다. 우리가 형상이라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과포화상태가 되어 결정crystal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개체는 차이 자체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생명이란 이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가 무 자르듯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늘 막을 통해 삼투압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비평형적 운동이 평형상태가 되면 죽는 것이고요. 따라서 생명은 안정적인 게 아니라 준안정적이라는 표현도 합니다. 개체란 질료들이 모여서 일정한 안정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며, 불균등성이 곧 개체화의 동력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은

山地剝, 地雷復괘를 읽고 각자 맡은 괘의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시몽동 책은 141쪽까지 읽습니다.

 

후기는 정옥샘
간식은 규창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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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1 08:53
    질료 형상 모델을 넘어서는 개체화에서 개체를 설명해주는 과포화 상태를 가져오다니, 이것은 철학자인가 과학자인가, 혜원샘의 깔끔한 정리와 넘치는 정보가 저를 과포화 상태로 만드네요 ㅋㅋㅋ 시몽동 책이 어려우니 주역이 그나마 괜찮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