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8.30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8-24 21:48
조회
202
이번에 읽은 괘는 산지박(山地剝)과 지뢰복(地雷復)입니다. 둘 다 양효가 하나뿐이고, 맨 위와 맨 아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박괘는 64괘 중에서도 아주 안 좋은 괘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음이 다섯 개나 차올랐고 하나 남은 양이 아등바등 대면서 곧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지요. 그럼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 남은 양마저 없어지면 완전 나쁜 게 되는 걸까?' 그런데 주역에서 순양과 순음으로 이루어진 건괘와 곤괘는 좋다거나 나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두 괘는 일종의 축으로 있지요. 그 두 괘 외 나머지 괘들은 모두 음과 양의 운동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힘이 어떻게 운동하는지 보는 게 중요하지 단순히 음과 양의 개수로 환원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박괘는 '갉아먹힌다[剝]'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아나는 것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계절로 치면 나무가 열매와 이파리마저 다 떨군 겨울입니다. 뭔가를 이뤄보겠다고 시도하거나 결과물을 거두는 괘도 아니지요. 점을 쳤는데 박괘가 나왔다면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역>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이렇게 다 떨어진 박괘 조차도 완전히 '나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박괘를 소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좋은 괘가 없습니다. 군자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고 온통 소인들의 세상이니까요. 소인답게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사리를 채우는 데 충실하면 사실 뭔 괘가 나와도 자신의 이익을 불리는 방식으로만 해석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관계성에 대한 몰이해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면 지속되길 원하고 불리한 상황이면 어서 제거되길 바라면서 그것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군자는 관게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사를 보면, 군자는 줄어들고 차고 비는 것을 숭상하니, 그것은 천행이다[ 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라고 나옵니다. 이에 대해 정이천은 맹자를 인용하여 '하늘을 섬기는 것[事天]'이라고 했습니다(cf.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알고, 성을 알면 천리(天理)를 알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이유는 하늘을 섬기기 위해서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 知天矣 存其心 養其性所以事天也 - <孟子> 진심장구). 세상이 지금 이모습 그대로 멈춰있지 않다는 것, 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관계성을 이해하면, 더 많은 연관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군자가 박괘를 보면, 나쁜 괘가 나왔다고 절망만 하진 않을 겁니다. 박괘의 상구효는 석과불식(碩果不食)입니다. 여기서 석과란 겨울을 견디며 하나 남은 열매를 말합니다. 이 열매가 씨앗이 되기 때문에 씨과일이라고도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남겨둬야 하는 것이죠. 계속될 것 같은 역경이 휘몰아쳐도 씨과일은 남겨둔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아남은 군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뢰복의 복(復)은 '돌아간다'는 뜻도 있지만 반복, 회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산지박과 반대로 지뢰복은 음만 있는 가운데 양이 처음 하나 드러난 형국입니다. 이를 두고 정이천은 "물건은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박(剝)이 위에서 궁극하면 아래로 돌아오므로 박괘로 받았다"고 합니다. 물건이 깎이고 다할 수만은 없다는 것. 복괘는 절기상으로는 가장 춥고 밤이 긴 동지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주역>은 가장 춥고 어둡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춥다는 것은 이제 따뜻해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복괘는 봄의 시작을 이릅니다. 이렇게 보면 <주역>의 시선은 단지 눈앞의 현상에만 가지 않습니다. 가령 음밖에 없는 곤괘의 10월은 다시 양효가 생기기 때문에 양월(陽月)로 봅니다. 모든 것을 운동성 속에서 본다면, 계속 머무르는 상태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복괘의 미덕은 근본을 잃지 않는 기다림입니다. 수(需)괘도 기다림이었는데요, 이것은 시대를 아직 만나지 못한 군자가 자신의 역량을 기르는 기다림에 가까웠지요. 복괘도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이제 슬슬 기운을 펼 수 있는 때를 만나기 시작하는 형국이니 이럴 때일수록 선(善)으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혹시 마음이 흐뜨려지고 잘못하게 될까 하는 찰나 다시 자신을 바로잡는 결단력! 안회는 드러난 과실이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는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수신(修身)의 자세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괘는 신독(愼獨)과 수신의 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이 자꾸 안 되는 이유는? 원칙을 능가하는 습관의 편안함 때문입니다. 육삼과 육사가 그런 모습이지요. 육삼은 자꾸 자신을 잃어서 돌아오기를 빈번하게 하는 효입니다. 육사 역시 하던대로, 혹은 주변에서 가자는대로 떠났다가 겨우겨우 홀로 돌아오는 결단력을 발휘하는 효이지요. 그래서 빈복(頻復)이나 독복(獨復)을 호로 나눠 가지자는(!) 이야기가 강의 중간에 나왔습니다^^;; 그만큼 습관에 휩쓸려가는 우를 조심해야, 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주역>의 시선은 지금 우리가 현상을 보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가령 박괘를 보아도, 이것을 음효 다섯 개와 양효 하나로 이루어진 것으로, 양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운동하는 가운데 자신의 워상을 갖고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를 시몽동은 준안정적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준안정적이라는 것은 흔들리는 안정성을 말하고 시스템이란 하나의 단일체가 아님을 뜻합니다. 즉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미 복합물임을 말하는 것이 준안정적 시스템입니다. 괘를 이 시스템으로 본다면 단지 점을 쳐서 나오는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괘를 얻어도 그것이 더 극에 달한 괘, 그 이전의 괘, 뒤집힌 괘 등등의 운동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채운샘은 이를 들뢰즈의 영화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가령 100컷짜리 영화가 있다면, 첫 번째 컷은 두 번째 컷을 보는 것으로 인해 완전히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0컷을 다 보고 난 관객은 단지 100컷만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컷과 컷 사이의 시간을 채워넣으며 기억합니다. 즉 100컷으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영화라는 것. 64괘는 극도로 단순한 기호이고 그 효사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의 운동성을 우리는 포착함으로써 괘를 '읽는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주는


-나눠드린 시몽동의 논문을 읽어옵니다.

-<주역>은 천뢰무망(天雷无妄), 산천대축(山天大畜) 괘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드디어(!) 시몽동의 책을 접어두고, 시몽동의 개념을 정리한 책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를 먼저 읽을 예정입니다. 다음주에 준비해 옵니다.


후기는 정옥샘

간식은 태미샘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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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8 00:04
    모든 것이 파탄난 절망의 시기에 다음 국면을 위해 최소한의 떳떳함은 지키겠다는 박괘와 차가운 땅속에 웅크리고 앉아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얼어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복괘를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의지나 경험치만으로는 이럴 때 쉽게 단념하고 나가 떨어지기 쉬울 것 같습니다. 우주는 쉼없이 항상 움직이고 변한다는 하늘의 이치를 긍정하고 섬기는 자가 하게되는 고귀한 자기결단만이 가능한 태도이죠. 주역의 말씀은 늘 멋지지만 이번 괘들은 특히 좀 뭉클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64괘는 극도로 단순한 기호이고 그 효사들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못 본거 아니죠?ㅋㅋㅋ 몽동님 읽다가 종종 만나게 되는 당황스러움의 순간이 잘 드러나 있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