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NY 2학기 8주차 후기

작성자
NY
작성일
2020-06-26 23:43
조회
91
 

<도덕의 계보>는 ‘같은 가치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상이한 힘 의지에 기반한 것인가?’를 역사 속에서 살핍니다. 좋고 나쁨, 선과 악, 양심, 죄, 가책, 금욕 등의 개념들이 ‘어떤 힘, 어떤 힘의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출현한 것인지’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 들여왔던 개념들의 변형, 변질되는 국면을 니체는 아주 꼼꼼하게 분석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금번 2학기 에세이는 각자의 ‘도덕’을 해체하는 것이 미션입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해야 함’ 등의 당위, 의무, 목적 등 현재 자신을 추동하는 힘과 힘의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움직이는지 분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꼼꼼히...;;)

2논문은 인류학적 차원에서 죄, 양심, 형벌, 고통, 정의, 법 등의 기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니체는 오늘날 도덕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죄’의 의미가 계약관계에서의 부채 개념에서 유래되었음을 알아냅니다. 계약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서로 동등한 힘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빚이 생겼다는 것은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무자, 그의 열패를 의미했습니다. 또, 손해와 고통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관념은 채권자가 손해에 대해 직접적인 이익을 받는 대신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감을 누릴 수 있는 권한 행사도 가능함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채무자는 자신의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으로 부채를 탕감할 수 있었고 죄는 내면화되지 않은 채 사라졌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의식한다거나 양심을 가책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단계의 형벌이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지배권, 우월감,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보상의 의미였던 반면 오늘날 형벌은 죄인으로부터의 안전한 사회 유지, 법질서 구현 등의 의미로써 공통의 두려움을 막고자 운용되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법’ 역시 본래는 강한 힘들이 예속적 힘, 반동적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됐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 법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따라야 할 기준, 규범으로 존재합니다. ‘고통’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자연스런 삶의 일부였고 또 때로는 축제에 등장할 만큼 흥을 돋우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했지만 오늘날 고통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정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공정함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동등한 가치로 교환, 계약이 가능하다는 동등한 힘의 평가였습니다.

역사적 국면마다 다르게 출현하는 도덕의 여러 개념들, 그 상이한 해석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제거되어야 할 무엇으로의 여겨지는 ‘고통’에 대한 다른 시각을 요구 받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더 자세한 에세이 미션이 다시 공지됩니다.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죄’나 ‘형벌’, ‘고통’ 등이 어떤 스토리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자신이 ‘고통’이라 여기는 그 지점에 어떤 의식의 기만이 작동하고 있는지 분석해 보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해석된 결과이지, 주어진 무엇이 아니며 세상만물은 모두 ’변화‘한다는 불변의 진리로 인해 고통은 고통으로만 남을 수 없습니다. 힘의 작동 속에서 존재를 보면 더더욱 좋고 나쁨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태도인 것”으로 니체에게 ‘바름’이란 능동적인 힘의 표현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봅니다.

 

<금욕주의적 이상>

신앙에서의 이상세계란 아마 천국과 같은 이미지일 것입니다. 보통의 관념에 천국은 나쁜 일 하지 않은 사람이 가는 곳, 열심히 노력한 사람, 참고 견딘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동시에 열심히 일한 개미와 같은 사람과 노래하고 놀기만 하는 베짱이 같은 사람이 똑같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질문을 합니다. 베짱이에게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요?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천국에 가서 일하지 않게 된다면 그는 그런 천국에서의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게 될까요? 만약, 삶의 가치가 땀 흘리는 것, 노동력의 가치만이 ‘참되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금욕주의적 삶과 거리가 먼 것 같은 시인이나 예술가와 같은 사람들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상세계를 알 수 없는 걸까요?

은연중에 우리는 이상세계에 가기 위한 조건으로 ‘금욕’을 전제하고 동시에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힘의 차원에서 살펴보면 일하는 개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 기질에 따라 일하는 모습으로 존재를 드러낼 뿐입니다. 베짱이는 자신의 처지에서 노는 것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일을 해야 하는 여건에 베짱이가 놓인다면 베짱이의 정체성은 노동하는 개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개미의 베짱이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국면에 따라 존재는 언제든지 변형, 변질됩니다. 거꾸로 이러한 논리는 고정된 본질이나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개미와 같은 금욕적 삶과 이상 세계의 기준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니체의 세계에서 모든 현존은 항상 변화하고 차이를 가집니다. 무수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하나의기준을 강요하고 나머지 가치들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무리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개체의 삶도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순간, 그 열매만이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의 대부분의 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무의 열매는 나무의 삶 중 일부일 뿐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다 보니 열매를 맺게도 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존의 인식과 관념을 전제로 사유한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아닌 차별화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제가 가진 당위, 믿음과 같은 기준에 의해 버려지거나 끊어진 인연들이 어마어마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얼...) 에세이 소재가 엄청난 걸까요??? 그러나 제 기억력은 매우 약하고 니체의 논리대로 분석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니까.... 다시 보니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하는것이 제일인듯 합니다. 내일 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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