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차탁마 NY 10주차(7.11) 에세이 발표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7-01 15:43
조회
139
에세이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서로의 에세이 주제를 가지고 조별로 진하게 토론을 하고 또 채운샘께서 더욱 찐~하게 코멘트를 해주셨습니다. 저녁도 함께 먹고 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심각한 병이라고 말합니다. 비유로서가 아니라 메커니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은 여러 강제들에 의해 방출되지 못한 힘이 자신의 내면을 공격하는 현상입니다. 병원균에 저항해야 할 면역세포들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처럼 대상을 찾지 못한 원한의 감정이 자신으로 방향을 돌린 상태. 채운샘은 이것을 ‘면역결핍증’과 같다고도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병 중의 병입니다. 어떤 면역체계도 만들지 못하는 신체는 상처를 계속 간직하고 아로새기면서 점점 허약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고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환기하면서 그 원인과 책임을 자기 안에서,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형식으로 발견하는 존재는 틀림없이 아픈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전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그런 자들에게 마취제를 뿌립니다. 그들의 괴로움이 폭발하지는 않으면서 계속 아플 수 있도록, 고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대가를 받을 것이다, 다음 순간에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믿고 참으라는 식으로 고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보상과 대가로서의 천국. 그것이 주어지는 순간 지금의 고통은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감내할 만한 것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월급날의 보상을 위한 노동과 다를 게 없다는 채운샘의 말씀에 무척 놀랐습니다. 의미가 주어지는 순간(그것도 현재의 삶 바깥에 있는), 기꺼이 그 고통을 원하기까지 하는 것이 새삼 무척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그것이 이미 우리의 너무 익숙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요.

그러나 양심의 가책과 금욕적 이상의 메커니즘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쨌든 의미를 제공하고 삶의 고통을 견디게 해줬으니 된 거 아닐까요? 우리는 여기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디는 것이 조금도 우리 자신을 더 건강한 존재로, 더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에 고통과 관계 맺는 방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삶은 어쨌든 고통스럽다는 전제. 그러므로 참고 견디면 대가가 올거다, 이 말을 믿으라는 말씀. 불교의 가르침은 전혀 다릅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변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마음, 곧 집착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조건들 속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어떤 마음 작용들이 고통을 낳는지 묻고 이해하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부처님은 “나는 누구의 고통도 씻어줄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너희 자신 밖에는 할 수 없다. 단지 나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일이 자기가 밟아나가야 할 과정이며, 단지 믿어버리는 것으로 손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신기하게도 고통을 싫어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과정이 힘겨우면 계속 고통을 받기를 바랍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말이죠.

제 생각에 양심, 가책, 죄의식이라는 마음의 작용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 오로지 고통 혹은 그 고통을 주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밖에는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양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것을 맹금과 자신의 관계로 환원시키는 편협함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자신의 고통과의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 고통을 타자에 대한 원한 혹은 자신에 대한 가책으로 돌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다른 전체의 관계들 속에서 보는 일입니다. A와 B 둘의 이원적 구도가 아니라, 그것이 C, D, E 등 다른 것들과 맺는 복잡한 힘들의 관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그 자폐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채운샘은 옛 문헌에는 자책하는 인간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뿐 아니라 중세에도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은 곧 우주의 변화를 바라보는 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군자는 자연의 법칙 혹은 그 통찰을 담은 문헌으로부터 윤리를 유추하는 자들입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힌트는 우주에서 얻었지 결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여 묻는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사회적 통념과 보편도덕을 쫒지도 않았지요. 따라서 자기의 길을 ‘정향’할 때 우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의 도덕, 자본의 도덕과 같은 값싼 보편성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과 그것에 대한 드물고 고귀한 사유로 초석을 놓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힘들여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존 이해를 해체하는 작업이 우선일 것입니다. 나의 감정, 도덕, 나름의 존재론적 이해, 당위를 분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합니다.

니체의 존재론적 사유를 이해하려면 힘과 힘의지, 영원회귀의 개념을 먼저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주의 운동은 영원하고, 모든 것은 에너지가 응축해 form을 형성합니다. 해체되고 형성되고 해체되고 형성되고.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자, 다시 만들어질 것입니다. 보존되는 전체 우주 에너지 안에서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것만이 영원한 것이죠. 이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면, 개체이기 이전에 우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나’가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이 ‘나’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삶에는 결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게 잘 되지 않으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는 이러한 니체의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삶에는 결여가 없다고 하는지, 그것은 무슨 말인지, 그럼에도 왜 나는 결여를 만들고 있는지, 거기에는 어떤 방식의 편협함이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삶을 부정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이해했다면, 스스로 부여하는 구체적 훈련, 과제, 미션이 남을 것입니다.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공지합니다. 수요일(오늘)까지 정리된 에세이 주제와 개요를 올려주시고, 토요일(7월 4일)까지 초고를 올려주세요. 또 에세이 주간을 그냥 보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수 있기 위해 토요일 오후, 모일 수 있으신 분들은 모여서 조별로 초고를 코멘트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에세이 분량은 5쪽입니다!*

-7월 11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에세이 발표가 있습니다. 아침에 프린트도 하고 자리도 정리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제 시간에 시작할 수 있도록 평소보다 일찍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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