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9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이경희
작성일
2020-07-05 17:08
조회
98
늦었습니다.  지난 9주차 (6.27일) 수업 후기 올립니다.

9주차 수업은 도덕의 계보학을 마무리한 시간이다.

채운샘은 인간은 왜 고통을 제거하거나 그것을 없애는 방식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대다수 인간은 고통스런 삶이 싫다면서도 고통에 머문다. 어쩌면 고통에 머물고자 하는 것인지도.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고 붓다와 같은 성인이 말씀 하시지만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인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쉽게 퉁치거나 그냥 견딘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명하고 긍정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 마지막을 인간은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허무를 향한 의지는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541쪽)이다. 허무를 향한 의지는 삶에 대한 부정이며, 삶의 근본 원리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인간의 허무에 대한 의지는 삶과 삶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긍정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채운샘은 붓다의 말을 빌어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변하는 세상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을 느낀다’고 하셨다. 또한 삶이 무상함을 사람들은 겪어야 하며, 누구도 사람의 고통을 직접 씻어주거나 제거해 줄 수 없다고 붓다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자신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뿐.

반면에 기독교는 구원을 약속한다. 인간이 고통을 견뎌내는 훈련을 하게 한다. 인간은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을 탐구하지 않아도 된다. 고통엔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나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다. 기독교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통해 그런 문제를 지닌 인간의 삶을 내세로 연기(?)시켰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는 살아가되 고통의 의미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인간에게 두 가지 의미를 던져주었다.

1.인간은 죄를 가지고 있어서 고통스럽다.      2.고통을 가지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심판의 날에 구원(보상)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과 인간의 삶은 결여되었고,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 지금을 완벽하게 해줄 다른 것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게 한다. 이 세상을 결여로 인식하는 인간은 갈망하게 된다. 그들을 추동하는 것은 죄의식과 가책하는 부정의 방식이다. 결여와 부정이 추동할 때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상태에 대한 갈망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다른 것에 비추어 살아갈 때 우리는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결여를 의지해야 하는가? 긍정을 의지해야 하는가?

채운샘이 좀더 생각해 보자고 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능동적인 삶이다. 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 갈망하게 된다.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 자가 삶을 긍정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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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6 17:02
    어찌보면 삶의 결여를 도입하는 사유와 그에 맞서 삶의 충만을 가르치는 사유, 이 두 가지를 구분하고 전자를 고발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철학의 임무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여와 원한,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출발하는 삶은 그 표현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강력할 수 있더라도 결코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도덕의 계보>가 말해주는 기독교적 사유로 표현되는 원한의 문제와 정면대결하는 것이 관건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