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2주차(8.1)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7-26 17:33
조회
180
안녕하십니까! 꿀맛 같은 짧은 방학이 끝나고 이렇게 절차탁마 NY 3학기가 개강했습니다. 드디어 빨간색 표지의 니체 전집의 마지막 권인 <바그너의 경우, ~>을 읽게 되네요! 감개가 상당히 무량합니다. 놀랍게도 개강과 동시에 에세이 발표가 있었는데요, 지난 발표를 함께 하지 못했던 희진샘과, 수업을 많이 빠지게 되셔서 못쓰셨던 고은샘, 재시도를 하게 되신 내영샘, 이렇게 세 분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방학 동안 에세이와 씨름하며 고전하셨을 샘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세이에 대한 채운샘의 코멘트에서 제게 남았던 말씀은 ‘철학은 진단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면밀한 진단입니다. 대체 나의 병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아주 진솔하게 대답해가는 것. 그럴 때 병으로 드러난 증상을 나타나게 하는 미세한 원인들에 대한 분석과 처방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가령 원한의 감정이라는 것을 문제 삼을 때, 그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어떤 삶의 방식과 생리적 상태가 그것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지 그것의 메커니즘을 따라가볼 때에야 처방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병에 지지 않을 수 있는 건강도 발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과정은 니체 자신이 가장 잘 보여줍니다. 저희가 읽고 있는 <바그너의 경우>가 쓰여진 1888년의 니체는 극심한 건강 악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눈의 사분의 삼이 안 보일 정도였고, 강도 높은 우울증과 두통에 시달렸던 니체는 거기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신체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과 기후에 더 쉽게 무너지는 상태였기 때문에 니체는 자신의 섭생과 생활규칙을 더더욱 예민하고 엄격하게 만듭니다. 니체는 두통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몇 시간을 산책했고, 또 조금 더 낫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찾아 실스마리아에서 토리노로, 또 실스마리아로 이동합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이고 어느 때 무엇을 못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무너지며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에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집요할 정도로 관찰하고 미세한 실험들을 수행하는 것. 채운샘은 이것이 강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프지만 아픔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지는 않을 수 있는 삶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 바로 건강의 발명입니다.

고통과 치유에 관련해서 종교에 대해 말씀해주셨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나도 다양한 종교가 너무나도 다양한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울부짖는 자들’, 즉 인간의 고통이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합니다. 대체 왜 우리는 고통을 겪는가?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은 삶은 없을까?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의 처방과 구체적인 치료방법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가? 서로 상이하고 때로는 정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들 간의 차이는 바로 고통을 진단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령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들 본연의 혹은 육체의 죄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처방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죄를 사함받는 것이며 그 방법은 신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긴 하지만 다소 단순하고 방법론적으로 빈약합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의 집착이라고 보았습니다. 처방은 고통의 소멸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방대한 방법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요약하면 ‘고집멸도’의 단계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관념과 감각작용의 패턴을 의심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논리적 작업들이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춰 눈높이 식으로 이뤄지고, 그 설법들이 연구되고 전승되어왔습니다. 이 외에도 그리스인들은 원인을 신들의 유희로 진단했고 그렇기에 그들은 현존을 최대한 더 치열하고 놀이와 같이 겪어갔습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어땠을까요? 말하자면 니체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의 가치평가방식에서 비롯된 삶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유 방식, ‘선’과 ‘악’의 도덕 기준을 만들어내는 가치들로부터 우리의 고통이 생겨납니다. 처방은 긍정입니다. 방법은 ‘모든 가치의 전도’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저희가 니체의 텍스트에서 보아왔듯,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가치평가를 ‘토가 나올 정도로’ 되묻고 깨치고 뒤집는 길고도 어려운 작업이 뒤따릅니다. 고통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되는 길들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그너의 경우>를 읽었지만, 바그너를 들어보지도 않고 당시 독일의 오페라를 알아볼 마음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바그너를 우리가 생각하듯 한 명의 음악가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바그너는 19세기 후반 독일은 물론 유럽의 예술 전체를 대변하는 문화의 핵이었습니다. 바그너가 해마다 열었던 바이로이트 축제는 그 해에 새로 발표된 소설, 음악, 철학, 정치적 담론 등이 교류되는 종합예술의 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그너의 오페라는 문화 장르의 하나가 아니라 시대를 대변하고 선도하는 지적이고 대중적인 유럽 정신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그너가 부흥시킨 독일정신의 뿌리는 그다지 깊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세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근대 국가, 과학, 개인의 개념이 탄생하는 시기 정도 무렵입니다. 거기에는 괴테와 헤겔이 있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스피노자입니다. 저희가 <파우스트>에서 확인했듯, 괴테는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의 파멸을 천사에 의한 구원으로 마무리합니다. 괴테는 스피노자를 자신의 수준에서 해석해 신적인 우주 자연과의 합일로 표현했습니다. 헤겔은 스피노자를 다소 편협하게 받아들입니다. 신 개념을 절대정신 혹은 무한으로 해석함으로써 헤겔은 개체의 개방 또는 희생을 통한 전체에의 합일을 강조하지요. 바그너는 헤겔의 관점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들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는 방랑하는 탕아들이 사랑에 의해서 구원됩니다. 여성, 대지-어머니, 백치로 대표되는 존재들의 순결과 희생에 의해서 말이지요. 사랑을 특권화하는 낭만주의의 전형입니다.

괴테, 바그너, 니체. 이 셋에게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이라는 테마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되는가의 문제. 물론 이것은 중세적 의미의 신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간과학이 밝혀놓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근대의 주체적 개인에게 있어서의 구원입니다. 괴테는 땅으로 내려온 천사, 즉 자연-신에 의한 구원을 말했습니다. 바그너는 여성, 순결, 사랑, 죽음, 예술에 의한 구원을 말했습니다. 니체는 어땠을까요? 니체는 무엇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에 의한 자기 구원을 말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괴테나 바그너는 결국 외부적 대상에 의한 구원이라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외부적 대상이란, 신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결국 신적인 위상을 갖는 무언가(천사, 순결, 대중, 신화적인 것)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또 다른 우상화이자 또 다른 이상주의였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현실로부터 이상주의로의 도피가 어떻게 구원일 수 있을까 하고 묻습니다. 사실 그것은 신에 의한 구원으로부터 한 발짝도 못 나간 것에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니벨룽겐의 반지>의 제 3막 제목은 <신들의 황혼>입니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신들은 몰락했습니다. 그러나 바그너는 신들이 내려온 자리에 자신이 만든 이상들과 자신의 예술,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올려놓았습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즐김과 동시에, 독일 정신의 한 가운데 있음과 동시에 스스로 우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리고 그 앞에 쓴 <바그너의 경우>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우상을 향하는 저작입니다. 채운샘은 이 책을 “스스로 우상이 되어버린 음악 천재에 대한 비가”로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후기를 마치고, 이번 3학기와 4학기 커리에 대한 공지를 하겠습니다.

3학기에 읽을 텍스트는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입니다.

이번 학기에는 이 세 편을 읽고 에세이 한편 외 +@(암송? 대론?)가 있습니다.

4학기에는 <이 사람을 보라>와 <디오니소스 송가>를 읽으며 에세이를 씁니다.

마지막 학기에는 에세이 두 편을 씁니다. 니체의 개념을 소개하는 에세이와 니체의 책 한 권을 중심으로 자신이 어떻게 니체를 만났는지에 대한 일종의 서평 에세이입니다. 주제는 아래에 있는 것처럼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1) 개념 : 힘, 힘의지, 영원회귀, 초인 등

2) 책 서평(나는 니체를 이렇게 만났다!) : 청년 니체(<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니체의 회복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2, 니체의 변신(<아침놀>, <즐거운 학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치 전복자 니체(<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안티 크리스트>)

@공동작업 공지

3학기와 4학기는 읽는 텍스트가 짧은 대신 공동과제와 더불어 팀별 공동 작업(보시)이 있습니다. 매주 공통과제의 토픽에 해당하는 단편을 정리하는 참고자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방법은, 자신에게 할당된 범위에서 해당 토픽과 연결되는 단편을 골라서 간단한 주제와 표제를 남기는 것입니다. 가령, 다음 주 과제인 인식과 관련해서 ‘<아침놀>, 103절 감정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인식의 발생, 150절 가상과 대립되지 않는 인식’ 등으로 정리하여 숙제방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금요일 오후까지는 올려주세요~

즐거운 학문 –인영, 정아, 설

인간적인 – 승연, 현주, 민호

아침놀 – 나영, 고은, 건화

선악의 저편 – 은옥, 경희, 희진

차라투스트라 – 난희, 내영, 조율

@다음 주 공지

<우상의 황혼>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103쪽)까지 읽고, ‘철학에서의 ‘이성’’이라는 챕터를 중심으로, 니체에게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써오시면 됩니다. 참고자료 정리도 잊지 말아주시구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20-07-28 15:58
    '진단'에 대해 풀어준 부분이 와닿네요.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 단순히 인과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지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 이것이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