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3주차(8.8)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04 13:53
조회
129
<어떻게 ‘참된 세계’가 결국 꾸며낸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에서 니체는 철학(인식)의 역사를 6단계로 요약합니다. 잠깐 그 내용을 따라 가볼까요? 짧은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단순히 참된 세계라는 관념이 틀렸다고, 그것이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세계’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다양한 관점들과 의지들을 절묘하게 꿰뚫습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자기가 사상들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해 말하는데, 과거에는 그 사상이 존재를 숭배하느냐 생성을 긍정하느냐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삶의 궁핍에 의해 고뇌하는 자의 것인지 삶의 과잉에 의해 고뇌하는 자의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1단계는 플라톤의 철학입니다. 참된 세계가 존재하며 덕이 있다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단계.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의 이분법이 시작되지만, 아직까지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 ‘이 세계’는 그림자와 환영만이 지배하며 철학을 한다는 것은 ‘참된 것’으로 시선을 돌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이지만, 동굴 밖으로 나간 철학자는 천국(다른 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동굴로 돌아옵니다. 2단계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참된 세계에는 도달할 수 없지만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참된 세계라는 관념이 더욱 정교해지고 위험해집니다. 그 관념이 반응적 힘들과 결합한 것이죠. ‘참된 세계’라는 관념 자체가 ‘지금 이 세계’에 대한 원한과 결합하여 금욕적 이상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이 두 단계에서 중요한 것이 구원에 대한 다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라톤 철학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은 참된 것과 가상의 것의 이분법을, 그리고 참된 것(본질, 창조주)을 원인으로 가상인 것(현상, 피조물)들이 생겨난다는 관점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참된 것으로의 구원이 플라톤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자기인식과 자기배려의 철학적 수련에 의한 것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피조물들은 오직 창조주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구원과 타자에 의한 구원이 각각 문제가 되는 것이죠.

3단계는 칸트의 철학입니다. 참된 세계는 도달할 수도 증명할 수도 약속될 수도 없지만 명령으로서 요청됩니다. 이성은 참된 세계로부터 추방되었지만 참된 세계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도덕적 정언명령을 그것과 간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습니다. 4단계는 실증주의입니다. 실증주의는 ‘알려진 것’,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적이고 유의미하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의무도지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참된 세계를 멀리 치워버립니다. 이 두 단계와 관련해서 저는 이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칸트는 이성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비판하고 한계 짓도록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참된 세계를 긍정하죠. 반대로 실증주의자들은 실증적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부정합니다. 한쪽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한쪽은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입증 가능한 것 외에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어쩌면 이 둘은 모두 사유를 이성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유와 이성을 동일시할 때 우리는 이성의 한계에서 사유를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성 너머의 무엇인가를 실체화하거나 혹은 이성의 빛이 비추는 협소한 세계로 쪼그라들게 됩니다.

5단계는 자유주의입니다. 자유정신들은 참된 세계가 쓸모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반박합니다. 실증주의가 참된 세계가 입증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다면, 이들은 도덕, 진리, 합리성 같은 참된 세계에 속하거나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을 혐오하기 때문에 참된 세계를 반박합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각났습니다. 진리는 없다, 주체는 없다, 중심은 없다, 예술은 없다 …… 모든 것은 가상이다! 마지막 6단계는 차라투스트라,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정오의 순간입니다. 이제 참된 세계는 완전히 반박되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의 세계도 반박되었습니다. 이제 사유와 실천의 문제는 참된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며 가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든 것은 가상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들이 관점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럴 뿐,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모든 것은 가상이라는 말과 모든 것이 참되다는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관점적으로 존재합니다. 이제 참된 것(본질)과 가상의 것(현상)의 이원론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체’입니다. 이때 신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유의 임무는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힘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함으로써 신체능력과 정신의 역량을 동시에 증대시키는 것. 이는 참된 것을 추구하는 것도, 올바른 것을 인식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유 안에서, 어떤 낯선 것과 만나서도 관계를 실험할 수 있는 가벼움을 구성하는 것이 사유의 활동이 됩니다. 그 자체로 실천인 사유, 자기 자신을 변이시키면서 세계를 다르게 출현시키는 사유, 자기 안에 차이를 도입함으로써 비교 불가능한 기쁨을 구성하는 사유만이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시간 공지입니다. <우상의 황혼>을 140쪽까지 읽고 "도덕과 종교는 전적으로 오류의 심리학에 속한다"(121쪽)는 말을 이해하고 소화해서 풀어내는 글을 쓰시면 됩니다. 텍스트 정리 작업은 '종교'에 관한 구절들을 정리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간식은 승연샘과 경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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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5 12:07
    모든 것이 관점적으로 존재하는 사유 속에서 남는 일은 '신체'로서의 자신의 기쁨을 구성하는 일. 말로는 이렇게 표현이 되지만, 그 수준이 어떤 것일지,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두고두고 되물어봐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