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2-5후기

작성자
동글
작성일
2020-06-08 23:59
조회
80
8장은 국가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대한 사유이다. 먼저 국가 구조에 대한 스피노자의 시각은 국가는 일종의 닫힌 사이클이다. 여기서 닫혔다는 것은 나름의 통일성과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개체라는 점에서 닫혔다고 본다. “사이클로 가동되면서 스스로를 항구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운동 체계” 이건 개체에 대해서도 성립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서 “개인들은 영토 위에 이리저리 분포하며, 무장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소유제에 의해 방향과 한계가 규정되는 욕망들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각각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이 개인들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운동하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전체, 이것이 국가다. 국가 자체도 그런 점에서 독특한 실재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사회를 하나의 기계라고 말한다. 그 기계를 흘러 다니고 있는 무규정적인 흐름들을 욕망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욕망들은 그냥 막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과 일정한 코드에 의해 접속하고 그 다음에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끊임없이 배타적으로 선택하거나 아니면 종합적으로 선택을 하면서 접속을 한다. 아무튼 욕망은 접속이 기초가 돼서 이것들을 확장해나가는 그런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들의 접속체의 전체를 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사회를 기계라고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국가를 보는 방식도 그것이다. 국가란 피라미드 형식이 아니고 기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평면이다. 무수한 욕망을 가진 개인들, 정념과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이뤄내는 특정한 운동과 정지의 비율. 다만 우리의 신체가 그러하듯이 모든 개체의 신체가 그러하듯이 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부단한 운동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니체가 발생을 사유한다는 것이나 기원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전하고 다르게 새롭게 무언가 출현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기원이란 다양한 힘들의 복잡한 투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 장으로 가는 것이다. 푸코의 표현에 따르면 먼지가 휘날리는 기원의 장, 그건 전투의 장이라는 것이다. 상이한 힘들이 서로 관계하는 속에서 뭔가가 승리하고 뭔가가 패배하면서 만들어지게 되는 그게 바로 기원이다. 기원은 파란 하늘, 깨끗한 흰색, 순백색 이것이 아니라 뿌연 회색이라고 푸코가 이야기한 것이 그런 니체의 기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역동적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태초에 뭐가 없다가 있는 것은 없다. 다양한 것들이 마트롱이 표현대로 하면 견고해지거나 좀 더 규정적이 되거나 그러니까 규정적이 않은 상태에서 좀 더 규정적인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좀 더 복잡한 것으로, 이렇게 될 뿐인 것이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새로 생기지는 않는다.

막시즘을 비롯해서 우리가 오랫동안 전제해왔던 국가란 억압기구다. 국가는 저 위에 총체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뭔가가 있고, 그 상하의 위계에 따라서 명령을 받는 인민이 있다. 억압하는 국가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너뜨려야 된다. 억압하는 국가조차도 사실 그걸 형성해내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그 국가라고 하는 개체를 이뤄내는 다양한 부분들이다. 이것이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선차하는 탈주와 탈영토화 운동이다.

우리가 더 좋은 것을 욕망하면서 그 좋은 것을 사유할 수 있는 이성으로. 이런 실험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국가에 종속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길이다. 뭔가 좀 다르지만 국가의 권력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국가의 권력 속에 우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권력을 누구로 대체하는 문제도 아니고 국가를 부정하는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활동이 국가를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가? 그렇게 부분과 전체,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관계를 좀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의 욕망, 우리의 욕망, 이것들이 공통적인 것을 형성해나가는 부분들의 운동은 그것 자체로서 국가의 역량을 구성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이 있는데 왜 저러냐고 봐서는 문제가 안 풀린다. 이성이란 전제되어 있지 않고 무기력하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될수록 계발된다. 정치의 문제는 이성을 발견하는 문제라고 봐야 된다. 모두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념만 누르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성이 거의 작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정념의 사회 속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이 정념들을 공통적으로 가져갈 것인가? 어떤 정념에 내가 나를 일치시킬 것인가라는 것과 더불어서 그 정념의 작용이 이성을 어떻게 추동하는가? 사람들이 뭔가에 끌릴 때 그게 옳아서 끌린다는 전제가 이제 깨진다. 정념이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될 때 이성의 역량이 함께 커지는 것이다. 이성이 있는데 이성을 사용하지 못해서 무기력하게 정념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 정치는 그동안 정념을 너무 무시해 왔다. 그러니까 얼마나 더 올바른 정치적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더 이념적으로 올바른 그 사람이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올바른 이념을 가지고 있냐를 가지고 판단을 했다. 저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의 정서를 숭고하게 만들어주고 좀 멋있게 만들어준다는 이런 차원을 정치에서 잊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논쟁이 되게 공허되었다. 사람들은 왜 저것에 끌릴까? 그 끌리는 것에 대한 정념의 모방과 정념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부터 이해하면서, 이 지점에서 어떻게 이성을 확장할 수 있을까? 수련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것이 근대 정치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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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9 11:52
    이번에 마트롱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이성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면 세계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됩니다. ㅋㅋ 정치가 왜 보다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결될 수 없는지, 정서의 이성화, 이성의 정서화 라는 말들이 어떤 점에서 중요한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얼른 쌤들과 맹자를 같이 읽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