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6월 17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0-06-12 20:06
조회
76
다음 주에는 마트롱 10장 〈순전히 외적인 통일〉·11장 〈내적 통일을 향해〉, 한비자는 〈궤사〉를 읽고, 마트롱이 통일을 어떻게 얘기하는지를 위주로 메모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영님쌤께 부탁드릴게요. 감자는 연구실에서 준비해놓을 테니 시원한 과일 같은 것들을 준비해주세요~

 
“실로 아직까지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 (…) 왜냐하면 지금까지 누구도 신체의 모든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신체의 구조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에티카, 3:2의 주석)

저는 이 구절이 신체의 무한한 잠재력, 개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유한양태에 대한 스피노자의 긍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간에 마트롱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문자 그대로 ‘누구도 신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물체는 복합물체입니다. 그리고 복합물체의 부분들도 또 다른 부분으로 이루어진 복합물체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회 나아가 전 우주까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개체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사유를 가능케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함으로써 국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몸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개체 이전에 개체화가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개체는 끊임없는 변용을 통해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국가 역시 ‘국가화’를 통해서만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국가화’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변용, 다시 말해 구성원들의 욕망입니다. 구성원들의 욕망이 어떤 식으로 접속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역량도 구성됩니다.

물론 구성원들의 욕망을 논하기 이전에 그들이 생존을 지속할 수 있는 기본 토대로서의 항산(恒産)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식량을 확보하고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는 “단조롭고 무감각”한 삶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희망/공포의 사이클, 인격숭배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생물학적 건강과 안전만으로는 균형의 실현과 거리가 멉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적 안전은 지각장의 다양화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지성을 촉진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체가 더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고 변용함으로써만 삶의 균형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토론은 사회의 변용 능력과 개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정치적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트롱이 말하는 토론은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수다와 다릅니다. 수다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굳이 맞지 않는 사람과 불편한 얘기를 할 바에야 대화 나누기에 편한 사람을 찾으면 되니까요. 물론 수다만 떤다고 해서 우리 삶이 크게 위태로워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삶에서는 그럭저럭 사는 것 이상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없을 뿐입니다. 보다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토론이 불가피합니다.

마트롱이 말하는 토론이 이루어지려면, 최소한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기 존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각에 변형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토론은 어쨌든 집단의 결정을 도출하기 위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토론도 모든 사람들이 100% 동의할 수 있는 결정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토론을 하는 것은 설령 완전히 동의할 수 없어도 최소한 납득 가능한 결정에 이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본적으로 변용 소질이 높은 사람들만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미신에 빠진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설령 길고 더딘 토론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미신적인 광신이 이를 방해할 것”입니다.(524) 그들 사이에서는 설령 일치가 일어나더라도 다수결에 강압적으로 결정된 것이거나 특정 인물에게 의존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구성원들 사이에 토론이 활발하다는 것은 현재 그 사회의 역량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가능합니다. 흑인 시위 같은 운동을 비롯해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매우 많은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리치가 지적했듯이, 문명이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 미디어를 사용할 때조차 요청되는 것도 우리 자신의 역량입니다.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토론이 바로 맹자가 말한 ‘말을 이해하는 것(知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맹자는 부동심(不動心)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과 ‘말을 이해하는 것’ 두 가지로 얘기했는데, 이 두 가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더군요. 스피노자적으로 생각하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맹자는 어떤 관계에 있다고 말을 하지 않으니 원.... 그런데 토론, 즉 타인의 말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변용 역량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다양한 것과 변이할 수 있는 유연한 신체성과 사유 역량은 동일합니다. 개인이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은 혼자서 자기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수양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신체를 갖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죠.

마트롱의 분석 덕분에 동양 철학과 연결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마지막 학기에는 지금의 정치를 스피노자와 동양 철학을 가지고 새롭게 문제제기하는 글쓰기를 쓸 예정인데, 쫄리기도 하지만 기대되기도 합니다. 채운쌤은 미리미리 동양 철학을 정치적으로 문제화할 수 있는 지점들을 정리하라고 하셨죠. 노자, 한비자, 맹자가 말하는 군주의 덕은 무엇인지,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그리고 통치에서의 제도, 백성은 어떤 요소로 작동하는지 등등. 이러한 것을 마음(心)이나 인식(知) 등의 키워드로 정리하라고 하셨죠. 올해 안에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해놓으면 두고두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여러모로 할수록 해야 할 것 투성이입니다!

 

강의 도중 채운쌤이 추천해주신 책은 뺄뛸 린뽀체의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정념 속 '조야한 이성'을 주장하시는 봉선쌤과 오늘'도' 인기만점인 간식 책상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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