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1월 23일 수업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9-01-25 14:35
조회
164
스피노자가 돌아왔습니다. 아울러 저도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확 일었다고 표현했지만 스피노자와의 재회에 얼마나 많은 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까요.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 원인들 외에도 무수한 원인들이 이미 관계되어 있었겠지요.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스피노자는 여전히 오묘합니다. 차분하고 따뜻한 인격성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정말 가슴 떨리는 해방감을 줍니다. 뭐라 언어로 옮기기엔 참으로 부족하지만 저에게는 강한 긍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유를 마구 촉발시키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철학자입니다.^^

이번 학기 우리는 마슈레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헤겔을 경유하여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에 도전합니다.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등 여러 문학이론 분야의 저서들로도 주목을 받고 있는 마슈레는 ‘문학적인 철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철학 자체의 한계, 철학의 외부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 안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어떤 지점, 철학 자체에서 발견하게 되는 어떤 맹점에 대하여 문학을 통해서 새롭게 질문을 합니다. 푸코도 같은 작업을 했지만 마슈레는 사유를 생산의 관점에서 생각하면서 철학에 있어서의 생산, 문학에 있어서의 생산, 이 상이해 보이는 생산들이 어떻게 서로의 외부에 작동하면서 서로의 문제점을 더 폭발·증대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사람이었습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제목 자체도 의미심장하죠. 스피노자를 자기 철학의 출발점으로 놓고 누구보다도 스피노자를 독해하고 비판했던 사람이 헤겔입니다. 그런데 헤겔의 전제는 스피노자가 실패한 것을 통해서 자기 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전제가 있었지요. 사실 ‘스피노자주의가 되고 싶은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아직 저의 포지션이 아닐까 생각하는 저로서는 마슈레가 정교하게 크로스시키는 헤겔과 스피노자의 개념들이 어렵긴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우리의 스피노자 이해를 헤겔 철학을 통해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되고, 그게 또한 마슈레의 의도가 아닐까요. 헤겔이 스피노자에게서 비판했던 방식이 오히려 스피노자에 대한 어떤 이해를 거꾸로 보여주기도 하고 스피노자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새로이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주 중요한 스피노자 독자로서의 헤겔의 독해를 따라가다보면 스피노자가 오해되어지는 지점도 선명히 보여지고, 헤겔이 읽어내지 못했거나 읽어내지 않은 것 일부러 오독한 것들도 가려내지면서 헤겔에 대한 또다른 이해의 길도 마련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두 사상이 반작용하는 지점에서 서로에게 공통적인 지반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헤겔이 스피노자를 독해한 방식으로부터 하나의 비판지점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슈레의 기획이었겠지요. 물론 헤겔이 진심으로 스피노자를 이해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자신 체계의 종속적인 한 요소로 소화 흡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말입니다.

애초에 사유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물적조건이 판이하게 달랐던 둘은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개체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어떻게 연관시켜서 사유할 것인가가 헤겔에겐 중요한 문제였고 스피노자에게서도 절대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을 설명하려 했다고 보았지만, 결정적으로 스피노자의 절대적인 것에 없는 운동성의 부재, 즉 절대자의 능동적 자기운동성의 부재가 모순을 매개로 한 부정의 운동을 거쳐 지양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과정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결과가 되었다고 헤겔은 보았습니다. 절대자의 완전한 자족성이 속성, 양태를 거쳐 점점 더 퇴락해가는 과정이 되어버린 것이 헤겔 마음에 안들었겠지요. 스피노자를 동양적 직관, 범신론으로 독해한 것은 헤겔의 몰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오해의 지점은 헤겔이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실체와 속성과 양태의 일의성을 이해하지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입니다.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평에서 일어난다는 이 혁명성을 헤겔이 읽어내지 못한 것이지요. 헤겔이 A를 not not A로 정의하는 방식, 내가 아닌 것들이 아니고서 남는 게 나라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서 자기극복을 해나가고, 그런 과정에서 개체성을 절대적인 것에 통합하는 과정과는 달리, 스피노자는 A는 이미 not A를 함축하고 있다는, 나는 이미 나 아닌 것들과 더불어서만 나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 어떤 부정도 포함하지 않으면서 개체성과 전체성을 한 지평 안에서 설명해내고 있죠.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을 설정하는 사유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위계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론적 평등이죠.

헤겔을 포함한 그리고 사실 오늘날의 우리도 시험에 들게 하는 『에티카』 정의 1은 자기원인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헤겔도 이 자기원인 개념을 문제삼는데요. 스피노자는 기존의 중세철학 그리고 데카르트가 써왔던 개념과는 다르게 이 개념을 전위시킵니다. 실존하기 위해 다른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원인도 자기 바깥에 두지 않는다는 철저한 초월론의 전복이지요. 이번에 샘께서 ‘그냥 있음 자체’라고 설명하시는 것이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저번 시간 우리가 읽은 정리8까지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실체, 속성, 양태가 제시되면서 실체가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신=실체=자연’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지요. 실체가 뭔지, 왜 실체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에 생각을 해보는 것이 숙제이기도 하구요.^^ 수업을 들으며 저는 『에티카』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되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질서를 여전히 위계적인 이미지로 사고하고 있었기에 처음 정의부터 점점 결론을 도출해가는 구조라고만 생각해왔다는 것을 샘의 설명을 듣고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뒤에 정리들의 증명을 통해 앞의 정의에 도달하는 비결정적이고 부정합적이기도 한 『에티카』의 구조를 염두에 두면서 찬찬히 읽어가야겠습니다. 개념의 이해를 자신의 통념 안에 가두지 않고 끄집어내며 자신의 사유를 모색해나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스피노자를 읽는 이 과정이겠지요.

내 안에서 일상에서 스피노자적 기계를 자유로이 작동시키기 위해 엄밀하게 스피노자의 사유를 쫓아가보는 길, 사유수행. 그 길이 귀하기에 어렵고 드물지만 기쁘게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 스승님과 적이면서 동시에 벗이 되어줄 동학들 그리고 막걸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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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26 08:29
    복학생 언니의 진두지휘로! 슝! 근데 막걸리를 드셨나봅네다? 다음주에는 우리가 완전체가 되는군요. 저도 개체와 전체의 관계에 대해 더 열심히 생각해보아야 겠습니다.
    현정 샘께는 스피노자와의 공부가 수행이군요. 저도 따르겠습니다.

  • 2019-01-26 11:28
    컴백하셨군요! 아울러 수요일 저녁 모임도 더욱 활성화되겠군요? ㅋㅋ 변증법이란 단어 말고 헤겔과 관련된 어떤 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스피노자를 헤겔을 경유하는 시도가 살짝 걱정되네요. 하지만 그 어려움을 함께 할 벗들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무식하게 뛰어들렵니다. 컴백을 축하드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