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 S 2월 13일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9-02-16 12:17
조회
113
이번에 에티카를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스피노자의 지성을 교정한다는 게 다시 생각났습니다. 대장장이가 복잡한 것들을 만들 때 사용하는 연장은 처음에 길가에 떨어진 자갈(불완전한 자연적 도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갈을 다듬고, 고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복잡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연장이 된 것이죠. 지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성은 그 자체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점점 완전한 지성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덜 유약한 지성으로 교정됩니다. 그리고 완전한 지성 같은 게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지성을 교정하는 좋은 방법 같은 것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인식을 위한 어떤 선험적 조건, 방법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ㅋㅋㅋ

 

원인에 의한 인식

데카르트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분석적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은 목적론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묻고, 원인의 원인을 물으며 무한히 소급하는 과정은 결정적으로 지금 나타난 결과보다 원인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 해당하는 알 수 없는 것의 극단에는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이 있습니다. 신과 개체, 저곳과 이곳 사이의 위계가 성립되고, 개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 자신을 불완전한 것으로 끊임없이 부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번역’합니다. 신, 자연, 기하학, 코나투스 등 그는 데카르트의 많은 개념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개념들을 다르게 해석해내죠. 스피노자에 따르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사물의 집합으로 ‘내 생각’이 결과로 도출되는 것입니다. 신이 나를 어떤 목적 속에서 만든 게 아니라 다양하게 많은 것들이 우연하게 모임으로써 ‘나’란 것도 실존할 수 있는 것이죠. 스피노자는 양태와의 변용 속에서 실존한다고 말했지만, 기(氣), 에너지, 입자, 파동, 정보 등 다양한 개념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이 우연적인 세계는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결과지만 특정 원인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채운쌤이 예로 들어주신 정자와 난자의 만남, DNA의 복제,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은 약간의 차이가 매우 다른 결과를 빚어내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 예를 들으면서, 수치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공정한 지식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특정 지식을 진리로 여기는 것임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따른 삶이 좋은 삶, 건강한 삶이 됩니다. 하지만 확률은 그 자체로 모든 사건의 결과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걸리면 50%의 환자가 8개월 이내에 죽는다는 복막 중피종에 걸렸지만, 그로부터 2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비법이 대마초인지 매달 한 편의 칼럼을 썼던 글쓰기 생활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굴드는 병에 걸렸다고 해서 병원에 자기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삶을 지속하는 지식과 실천은 병원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죠.

인식해야 할 진리도 없고,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더 나은 방법도 없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어떤 통계도 거부할 수 있는 개체의 윤리를 발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때 개체 차원에서 윤리를 발명하려면 지금 내가 처한 조건들과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러 실존적 고민을 동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굴드가 병원에 가지 않았던 것은 시한부 인생에 대해 겁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딘가 아프면 병원을 찾고, 지나가다 보게 된 의학적 지식들에 쉽게 수긍하게 되는 저로서는, 만약 굴드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것저것에 혹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는 작업입니다. 병원뿐만 아니라 학교, 국가 등 여러 제도로부터 어떻게 다른 관계를 맺을 것인지 빡시게 고민해야겠네요.

 

적합한 관념

서양철학의 전통적 인식론은 관념을 외부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한 표상으로 규정했습니다. 인식이란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각하는 능력이죠. 그래서 관념이 참되다는 것은 곧 관념과 그 관념이 표상한 외부대상에 일치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식을 발생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는 ‘참된 관념’ 옆에 ‘일치’가 아니라 ‘적합성’을 관련시킵니다. 일단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식하기 전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나 대상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식은 인식활동 속에서 구성되고, 인식이 구성되기 전에 반영될 수 있는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관념을 오류 혹은 진리라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관념은 그 자체로 참되지만, 전체의 필연적 질서에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적합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책도 읽어내야 할 정답이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하나의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자기 조건에서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입니다. 읽기에 관해선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길 여러 번 들었지만, 이제야 조금 이해된 것 같아요.

어쨌든 책에는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핵심내용들이 있고, 텍스트를 반복해서 읽을수록 그 핵심내용을 도출하는 데까지 더 효율적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으면 여전히 잘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그럴 때 저의 게으름(대체로 맞지만) 혹은 나쁜 머리 등을 탓하게 됩니다. 작년에 니체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힘의지’란 개념이 끝까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린지 쓰면서도 막막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는 ‘힘의지가 옳고, 힘의지의 존재를 통해 힘의지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증명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사고입니다. 그 옳음을 보증해주는 외부를 설정하고, 계속 그 외부에 합치하고자 하는 사고의 흐름. 그러나 채운쌤은 모든 철학은 단지 저기까지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 뗏목에 불과하다고 하셨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뛰어난 혹은 올바른 지식을 담보하는 개념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 당연한 것에 대해 의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이든 그것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를 얘기하면 이미 충분한 것이죠.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동일한 인식의 반복은 동일한 세계를 출현시킵니다. 여전히 어떤 것에서만 기쁨을 느낀다면, 똑같이 어떤 것을 문제로 느끼게 됩니다. 자기가 계속 동일하게 구성되기 때문에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다른 관점 같은 것도 생기지 않습니다. 더 큰 역량이란 완벽한 지성의 체득이 아니라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만큼입니다. 문제 자체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과 해결할 수 없는 오답으로 나뉘는 순간 사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에서 멀어집니다.

아직까지는 뭐라고 떠들고 있지만, 정서 얘기를 여기에 어떻게 버무릴 수 있을지 (여러 의미로) 기대되네요. @_@
전체 2

  • 2019-02-16 18:59
    원인으로부터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끊임없이 작용하고 작용받음으로서의 원인을 긍정하기. 이런 사유는 '중심'과 '주체'로 환원되지 인식을 낳습니다. @.@ 오직 양태의 차원에서 실천만이 문제가 되는 세계를 보라! 띠용, 띠용 @.@

  • 2019-02-17 12:11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그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 당연한 것에 대해 의심할 수 있기 때문.....
    마음에 와 닿네요. 저는 스피노자 공부가 많이 어렵습니다. 규창님의 글 '더 큰 역량이란 완벽한 지성의 체득이 아니라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만큼입니다'라는 귀절이 희망을 주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