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마이너스] 3주차(10.4)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9-10-11 15:23
조회
88
  1. 니체의 복수주의

들뢰즈는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본질적인 복수주의를 고려해야 한다.”(21쪽)고 말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의미의 복수성’이 단순히 사전 속 단어처럼 다수의 뜻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의미의 복수성은 의미의 다수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현상이 다의적이라고 하면 마치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고 인식주체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이라는 관계를 설정하고 대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다고 보는 저희가 아는 일반적인 상대주의의 구도입니다. 즉 현상의 의미는 개개의 주관에 속하는 것이므로 견줄 수도 비교될 수도 없는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도 또 다른 실천적 지점도 발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복수주의는 상대주의와 어떻게 다를까요? 무엇보다 복수주의에서 의미는 주관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전에 이미 주관이라는 것이 하나의 침해 불가능한 영역으로 특권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관이라고 여기는 주체의 관점 역시 그 순간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21쪽)의 장이기 때문에 의미는 한 사람에게조차 고정되지 않고 매번 다르게 붙들립니다. 예를 들어 신발을 사려하는 사람의 눈에는 사람들의 신발이 들어오듯, 주관은 그를 지배하는 욕망, 정서, 생리적 상태, 그를 둘러싼 기후, 습도, 연상되는 기억 등에 따라 계속 변화 중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하나의 독립된 주관들을 인정한다는 상대주의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복수주의는 어떤 사물, 관계, 관점을 지배하려하는 힘들의 복수성을 말합니다. 때문에 복수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는 것은 들뢰즈가 ‘성좌’라고 말한, 투쟁하는 복수적인 힘들의 계열들의 배치입니다.

 2. 의지철학

들뢰즈는 “힘의 존재는 복수이다”(25)라고 하면서 모든 힘은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힘은 언제나 “다른 힘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26)합니다. ‘A가 B보다 크다’라고 할 때 A는 그 자체로 ‘큼’을 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외부의 ‘B’와의 관계에서만 A의 크고 작음이 설정됩니다. 힘도 마찬가지로 외부의 힘과의 마주침 속에서만 계량되고 정의되고 평가되고 지배되거나 지배합니다. 이처럼 힘들 간의 ‘관계’에 주목할 때 힘은 의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힘, 의지, 힘의지 등의 개념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아 조금 힘들어하기도 했는데요. 앞으로 또 다뤄질 개념이기에 세미나에서 이야기 나온 것들만 간단히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여기서의 의지는 저희가 아는 의미의 의지, 즉 무언가를 추구하며 발휘하거나 발휘하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아닙니다. 힘이 의지로 ‘불린다’라는 말은 곧 힘과 의지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의지가 힘 위에서 힘을 조종한다거나 주체에 귀속되어 있다는 상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의지라는 개념이 필요하며 힘이라고 말할 때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들뢰즈는 “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26)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의지라는 개념이 생명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차이화하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의지 없이 힘들의 관계만 있다고 한다면, 이미 형성된 힘들 간의 작용-반작용만 있는 기계론적 우주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즉 힘들의 평형상태로서의 우주이지요. 그러나 의지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단순한 힘들의 역학 관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방향성과 변화율, 차이화하는 운동과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참된 문제는 의욕과 비자발적인 것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그럭저럭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 있다.(27)”

의지라는 개념은 힘들의 복수성을 더 명확히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물리적 힘만이 작동하는 기계적 우주에서는 작은 힘은 언제나 더 큰 힘에 귀속되고 흡수됩니다. 그런 한에서 힘은 크고 작음이라는 규모로만 비교되기에 차이화하고 변화하는 힘들 간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지라는 개념은 ‘명령하는 의지’와 ‘그럭저럭 복종하는 의지’ 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럭저럭 복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지는 원하는 한에서만 복종되길 원”(27)합니다. 저희는 이를 생물체의 생명유지로 생각해보았는데요. 세포 하나하나의 살아있고자 하는 의지는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조직의 의지에 복종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위의 의지는 자신의 차이를 유지한 채 ‘원하는 한에서만’ 복종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차이가 긍정된다는 점에서 의지 혹은 힘의지라는 개념은 힘들의 서열들과 비평형상태, 그리고 힘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동성을 포착함으로서 힘의 복수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는 차이를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30)

  3. 변증법

차이 자체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반(反)변증법적 철학입니다. 니체가 소크라테스에서게부터 발견한 변증법적 철학은 언제나 “부정, 대립, 모순”(30)을 그 본질로 삼아, 어떤 것의 틀렸음에 의해 자기의 옳음을 구성합니다. 헤겔이 정립한 정-반-합의 원칙도 언제나 모순과 대립으로부터 긍정이 정립된다는 점에서 반응적입니다. 물론 니체 역시 부정을 중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부정은 더 큰 무언가를 형성하고 ‘오류의 소거’로 완성되는 합을 만들기 위한 목적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정한다.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이다!”(<즐거운 학문>, 307절) 잘 알려진 이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니체가 어떤 가치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파괴하는 일은 이미 그 자체로 다른 자리에 가 있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부정은 “이 활동으로부터, 적극적인 힘의 현존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차이의 긍정으로부터 나온다”(30)고 말합니다. 니체의 부정은 현존 그 자체의 산물이고 “현존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격성, 긍정의 공격성”(30)입니다.

한 가지 예로 저희는 니체가 역사를 보는 관점, 특히 문화의 부패를 보는 관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보편적 신앙 대신 미신이 맹위를 떨치고, ‘조국’이나 민족적 열정이 사그라들고 개인들이 중시되는 현상, 즉 민심이 분분한 현상을 니체는 그 자체로 완성이자 진보로 보았습니다. “부패란 한 민족의 가을을 비방해서 하는 말일 뿐”(<즐거운 학문>, 23절)이라고 말합니다. 가을이 그 자체로 긍정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부패라는 말은 비방입니다. 반면에 헤겔이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부패를 다음의 ‘합’의 상태로 가기 위한 부정이자 모순의 ‘반’ 상태로 보았을 것입니다.

부정으로부터의 반정립된 긍정. 들뢰즈는 이러한 변증법적 작업을 “부정의 노동”(31)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반응할 뿐인 사고방식. 니체는 이를 노예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노예에게는 “모순의 추상적인 사고가 적극적 차이의 구체적 감정보다 우세하고, 반작용이 작용보다 우세하며, 복수 및 원한의 공격성을 대신”(32)하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지 더 횡설수설하게 되었네요.... 그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내일)는 5장 6장을 읽고 토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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