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마이너스] 4주차(10.12) 후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10-18 09:28
조회
81
 이번 시간에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5, 6장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이번 장에서 들뢰즈는 “비극”의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에 있어서, 니체의 사고를 “변증법화 시키는 것”을 왜 피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변증법의 경우 “비극을 부정, 대립, 모습과 관련”시킵니다. 삶 속에는 대립되어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음과 삶, 유한함과 무한함, 개별성과 보편성 등. 저는 변증법을 어떤 부정항을 제거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사고 체계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때 부정항은 개별적이고 유한한 조건 속에 놓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입니다. 변증법적 사유체계에서는 나쁘다고 여긴 것을 부정하고, 좋은 상태가 따로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정을 통해서만 삶이 긍정되는 것이죠. 들뢰즈는 “변증법이 비극을 체험하고 이해하며 사유함에 있어서 선척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제가 변증법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제거하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모순들로 보이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경우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방법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거기서 이해되는 방식”을 제시해준다고 말합니다. ‘거기서 이해되는 방식’이란 무엇일까요? 삶의 불가해함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니체를 공부하면서 계속 드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초기 작품인 <비극의 탄생>에는 변증법적인 사고 체계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보았습니다.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본질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새로운 비극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극의 탄생>의 진행 과정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미나 시간에 이 내용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생소한 개념(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소크라테스)과 ‘디오니소스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구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폴론에서 소크라테스로 전환된 계기와 관련된 질문들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신화 속 인물들이 니체의 저작에 왜 나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절탁 선생님들께서 최대한 아는 한도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아폴론은 개체의 고통을 지우기 위해 개별화의 원리를 신성시하고 조형성을 구축하려는 힘으로, 디오니소스는 개체성을 파괴하고 원초적 통일로 되돌아가려는, 통합하려는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모순의 항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모순을 해소해줍니다. 니체는 비극을 두 힘의 화해라고 보았습니다. 비극이라는 극의 형식은 아폴론적 힘이지만 개별화의 고통과 같은 비극의 주제는 디오니소스적 힘으로 해소됩니다. 이처럼 <비극의 탄생>에서 “비극은 원초적 모순과 디오니소스적 해결과 이 해결에서의 극적 표현으로 정의”됩니다. 그리스 비극은 모순을 재생산하고 해소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가 “긍정적인 신, 긍정하는 신”으로 끈기 있게 제시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긍정이란 미적이나 지적으로 삶을 포장해서 정당화하거나 죄를 용서받고 내세를 믿으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이 두 번째 디오니소스가 처음의 디오니소스보다 우세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초-인격적 요소가 항상 긍정하는 요소에 동반되고 결국 후자의 특권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처음과 두 번째 디오니소스의 차이가 무엇인지 해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 주에 채운 샘께서 설명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긍정적 성격으로 전환된 후, 더 심각한 대립을 발견합니다.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 니체는 ‘참된’ 삶의 비극은 개별화의 고통이 아니라 삶을 관념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관념으로 삶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삶이 그 자체로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는 7-8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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