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5주차(10.19) 후기

작성자
hjlaha
작성일
2019-10-20 20:08
조회
84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대면해야 하는 순간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까에 주된 관심을 두지요. 왜 그럴까요?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변증법적 사고에 길들여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 변증법적 사고란 뭘까요? 그것은 삶을 대립적 요소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대립항이 됩니다. 이 세상을 모순적이라고 보는 거지요. 삶은 영원한 삶으로 존재해야 하고 빛은 항상 빛으로 빛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삶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고 빛에 어둠이 끼어든다고 봅니다. 그것은 불청객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과 어둠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은 기쁨과 대립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고통도 없애야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고통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차단되는 것이지요.

니체는 바로 이런 변증법적 사고가 기독교의 바탕에 깔려있다고 봅니다. 니체는 그의 저서 『반시대적 고찰』에서 디오니소스를 소크라테스, 즉 학문적 인간과 대립시킵니다. 이론적 인간은 인식의 확실성을 믿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항상 의식, 언어, 표상과 연관됩니다. 다시 말해 이론과 학문은 생성을 부정하는 자기의 세계를 본질이라고 전제합니다. 본질은 진리입니다. 학문은 진리를 상정해 놓고 그 관계 속에서 삶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삶은 폄하됩니다.’ 학문으로 인해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되지 못합니다. 학문에는 삶보다 더 우월한 항이 있어 그것이 삶을 평가하기 때문이지요. 삶의 평가 기준이 외부에 생겨버린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삶을 폄하하는 이론적 인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어떤 부정적 대립항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삶을 평가해야 할 어떤 외부적 가치 기준을 가지지 않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긍정되기 때문입니다.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는 문제를 기독교와 연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진정한 대립자로 간주한 것은 기독교, 바로 예수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삶의 긍정으로 기독교는 삶의 부정으로 전개됩니다. 긍정이란 단순히 어떤 것에 ‘예스’라고 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체험의 차원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체험의 차원이란 자신의 행위와 결부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체험을 통해 내 행위가 변해가는 것, 즉 다른 나-되기가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처럼 체험은 우리의 상식적 당위에 질문을 던지고 곱씹으면서 그것에 균열을 냅니다. 그래서 체험의 차원은 우리를 고정된 시선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변화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 차이를 생산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삶을 부정합니다. 삶을 부정하는 차원이 학문적 인간과는 다릅니다. ‘기독교 인간은 단순히 진리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서적인 것, 즉 힘들의 질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다시 말해 정서적으로 삶을 부정하도록 만듭니다.’ 기독교는 삶 속에 고통이 내재화되어 있다고 간주합니다. 본질적으로 삶이란 죄이며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죄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삶 자체가 고통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고통을 내면화한 것이지요. 그래서 살아갈 가치를 외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긍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삶을 부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기독교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것에서 구원을 찾게 되는 우리는 삶에 취약하게 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고통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니체는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디오니소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삶을 긍정하는 신인 디오니소스는 언급했듯이 삶을 평가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 삶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적 가치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통도 기독교와는 다르게 해석됩니다. 고통을 삶에서 해소해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니체의 디오니소스를 다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긍정으로 스스로 변신하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다수를 긍정한다는 것은 생성을 의미합니다. 생성은 생성과 소멸의 동시성을 뜻합니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끊임없는 차이를 생산해내는 장이 바로 디오니소스입니다. 그래서 고통도 기독교에서처럼 우리가 감내하거나 해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생성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변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뭔가를 계속 고정된 표상으로 붙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의 이치와 어긋납니다. 이 어긋남이 고통인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고통이 아닙니다. 하지만 항상 젊음만을 바라는 우리는 늙음과 죽음을 고통으로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고통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도 생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겪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긍정입니다. 즉 변화에 대한 긍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각자의 차이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연처럼 우리 인간도 항상 흐르고 변한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에서 차이화가 생깁니다. 차이화, 그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우리 삶의 결을 다르게 만들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 주는 8, 9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전체 1

  • 2019-10-23 12:36
    삶의 태도에 있어서 고통의 해석이라는 문제가 아주 핵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긍정이란 다른 나-되기, 차이를 생산하기라는 말씀이 공감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