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6주차(10.26)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19-11-03 16:55
조회
102
8. 비극의 본질

비극은 단지 긍정 그 자체의 복수성, 다수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비극을 정의하자면 비극은 다수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이다.

고통의 문제

가장 흔히 쓰는 말이 사실 가장 어렵습니다. 고통이라는 말도 그렇지요. 흔히 우리는 무엇을 고통이라고 할까요. 각자가 느끼는 고통은 저마다의 삶의 장에서 다채롭게 빚어지는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일관성이 있습니다. 가지려고 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오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이 속절없이 닥칠 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어제 가족 모임에 갔더니 아기를 키우는 사촌여동생한테 그 엄마가 하는 말, “우리 때는 서너 명을 키우면서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겨우 하나 키우면서 뭐가 힘들다는지.” 사촌여동생이 그 말에 “아이 하나 키우는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든다고. 그리고 우리는 여행도 가야 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졌거든.” 또 초로의 언니들은 얼굴 주름 걱정에 나이살이 붙는 걸 괴로워하더군요.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면 고통에서 벗어날까요, 오는 것을 오지 못하게 막으면 또 행복할까요. 자본주의는 돈만 있으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돈을 벌면 만사 오케이,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돈을 못 벌어 혈안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통은 가치평가된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가치만 바꾸면 사라지는 고통들이죠.

고통을 해석하기 위한 서사들

중국 작가 위화의 에세이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신은 후대에 사람들이 노래할 소재가 부족하지 않도록 불행을 만들었다.’ 또 하나는 맹자의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공과 시각에서 출발해 똑같이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불행과 우환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철학이 필요해지는 순간은 어떨 때일요까? 삶의 무의미성, 니체에 말로 ‘현존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신을 빌려 자신을 현실 밖에 두는 태도를 보이면서 서술자의 신분으로 인간사의 불행을 노래했습니다. 반면 동양의 현자는 어떤 외부도 소환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그 자체로 불행이 아니라 가치평가된 불행, 인간이 스스로 안락이라는 표상을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니, 인간은 그 안락을 깨는 것들은 모조리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우환과 안락을 둘로 보지 않는 이런 생의 태도는 옛동양의 정서입니다. 그러니 새삼 무슨 ‘Religion’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동지방에 전승된 가사 ‘덴동어미화전가’의 한 구절. “좋은 일도 그뿐이요/그른 일도 그뿐이라/꽃은 절로 피는 거요/ 새는 여사 우는 거요/ 바람은 일상 부는 거라/사람 눈이 이상하여/제대로 보면 괜찮은데/.../새소리도 고쳐듣고/슬픈 마음 절로 난다./마음 심자 제일이라/단단하게 맘 잡으라.” 필부의 깨달음의 경지는 지극히 편안합니다.

들뢰즈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현존의 고통을 해석하기 위해 어떤 신이 필요’했는데 그 이유가 현존을 그릇되거나 유죄인 것,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속죄하고 비난해야 할 어떤 대상을 요청하게 됐다는 것입니다.(P49) 이 대목에서 이반 일리치를 떠올립니다. 일리치는 인간의 문명이 어느 지점에서 전도된 것들의 증식과정이라고 봅니다. 삶을 위한 것들이 도리어 삶을 병들게 한다는 거죠.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치러야 할 것을 치러는 것이 가장 쉽게 넘어가는 길이라는 것. 병이 올 땐 병을 앓는 것, 닥친 것은 닥친 대로 이유가 있는데 이치를 이해하기 전에 손쉽게 ‘해소’하려고 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도 인간의 고통을 손쉽게 해결하려고 요청한 발명품이 아닐런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발명품으로 인해 오히려 삶은 죄를 만듭니다. 만들어진 신 때문에 무한히 증식하는 죄,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장치들. 악순환. 들뢰즈는 ‘니체의 전 저작이 이 의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의 비극을 빌려온 것도 기독교적 서사가 현존의 고통을 해석하는 것이 그 효과면에서 우리의 삶을 비틀고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점을 통찰했기 때문이겠지요. 신화든 종교든 현존의 의미, 고통을 해석하기 위한 장치라는 면에서 유의미합니다. 문제는 그 서사의 효과입니다. 기독교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합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생리적 쾌,불쾌를 행.불행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피할 방도를 찾습니다.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은 어김없이 옵니다. 이런 고통을 여윈 세상, 불완전함을 여윈 곳이 이상세계요 유토피아이며 천국일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삶은 그곳으로 가기 위해 감내해야 할 ‘감인의 땅’입니다. 삶은 마지못한 노동에 묶이고 생생한 충동은 억눌러야 하지요.

니체에게 그리스의 비극은 공포나 연민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승화나 의학적 승화라는 훌륭한 기능이나 교화의 기능’을 기대하는 관객은 ‘우둔’하다고 합니다. (p47) 들뢰즈가 보기에 니체가 비극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극이 그 자체로 ‘다수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을 표현하려는 것이란 것. 다수의 기쁨이란 찢겨진 개별자로 고통받는 신 디오니소스의 현현이 바로 아폴론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둘이 아니라는 것. 그리스인들에게 현존의 고통은 신들의 유희, 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고통은 드라마틱할수록 재미있으리라고 그리스인들은 상상했다는 겁니다. 비극은 개체가 겪는 고통을 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거리를 제공받고자했던 그리스인들의 발명품입니다. 관점주의란 디오니소스의 변신 즉 신체성을 바꿈으로써, 즉 다르게 삶으로써 기위 겪고 있는 고통이 다르게 해석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체의 고통은 존재하지만 바로 그 고통 때문에 괴롭지는 않을 겁니다. 복수성, (나)와 무수한 외부들의 만남으로 출현하는 고통의 해석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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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1-08 20:41
    저도 지난주 니체 마이너스 세미나를 하면서 비기너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리치와 푸코가 많이 떠올랐는데, 이렇게 샘 후기에 일리치가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정말 반갑네요ㅎㅎ 그 자체로 삶에 속하는 것들을 스스로 겪어내지 않으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사제나 제도나 전문가나 자본에게 품행의 인도를 허용하게 되고, '통치 가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통을 긍정한다는 것은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네요. 우환과 안락을 둘로 보지 않기! 지금 제게 정말 필요한 지혜입니다. 생동감 넘치는 후기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