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7주차(11.2)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11-08 23:55
조회
100
후기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벌써 내일이네요(ㅠㅠ). 더디지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니체 마이너스 세미나입니다. 이번 주에는 1장 비극 중 9번 '현존의 문제'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함께 읽은 부분에서 들뢰즈는 《비극의 탄생》을 쓸 당시 니체가 그리스인들로부터 주목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현존의 문제에 대한 비(非)기독교적인 입장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 존재함'을 이해하고 고통의 문제를 사유하는 낯선 관점과 태도를 니체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발견하고 주목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현존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그리스적 해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은 그리스적 해석과 기독교적 해석 사이의 차이보다는 오히려 유사성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기독교가 현존을 '죄'로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 또한 현존으로부터 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현존을 부조리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제우스의 질서에 매번 혼란을 야기하고 불균형을 도입하는 거인족(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토착세력에 반란을 일으킨 이주민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의 이미지로 그들의 세계관 속에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현존은 틀에 맞지 않는 것(넘쳐남)이며 측정하고 계산할 수 없는 것(과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존의 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은 현존의 부조리함l'injustice을 입증하는 수단이자 그것을 정당화justification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통'을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은 현존이 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의 증거이며 우리가 고통 받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동시에 그러한 죄에 대한 속죄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니체가 연구하기도 한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잘 나타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생성은 부정의이며 현존에 도래하는 다수의 것은 부정의의 총합"이며 그것들은 "서로 투쟁하고 자신들의 부정의를 프토라phtora[찾아봤는데 잘 나오지 않네요. 업業 혹은 그것의 소멸이라는 짧은 메모밖에 못 찾음]에 의해서 서로에게 속죄"(53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스인들이 현존을 부조리로, 죄로 보았다면 그들은 기독교도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적 사유가 현존에 대한 정당화를 현존 안에서 행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죄로부터 그것의 '책임성'을 추론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현존의 부조리함과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그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에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삶에 권태를 느낀 '신들의 놀이'일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문제는 현존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현존 안에서 현존을 속죄해가는 것이었죠. 이는 자신의 과도한 꾀로 인해 저지를 죄를 (지옥에 떨어지거나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힘으로써 스스로 갚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스인들에게 분명 현존은 유죄였지만, 이는 현존 안에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들에게는 짊어져야 할 무엇도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기독교에서 죄는 처음부터 상환 불가능한 부채로 주어집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죄 지은 존재인데 예수의 대속에 의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갚을 기회를 빼앗겨버린 것이죠. 이러한 기독교적 서사는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현존 안에서 처리해내지 못하는, 현실의 고통을 능동적으로 감내하지 못하고 고통의 원인에 대한 반응적인 원한에 사로잡히는, 현존에 대한 무력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무력하게 고통의 '책임'을 따지는 원한감정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독교적 양심의 가책과 인간의 현존에 대한 연민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니체는 똑같이 '고통'과 '죄'를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와 그리스가 고통과 죄의 문제를 해석하는 뉘앙스에는 비교 불가능한 차이가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이어지는 10번과 11번에서는 본격적으로 현존의 무책임성에 대한 니체의 사유가 전개될 것 같습니다.

간식은 난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내일은 10번 '현존과 결백'과 11번 '주사위 던지기'를 읽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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