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마이너스

니체 마이너스 복습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19-12-06 13:09
조회
163

두 종류의 고통과 두 종류의 고통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처럼 고통도 긍정으로 만든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그들은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재인식한다. <그와 반대로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로 경련과 마비를 만들고, 고통으로 삶을 비난하고 삶에 반대하는 수단을 만들고, 또 삶을 정당화하고 모순을 해소하는 수단을 만들어낸다 (P45)



나는 이 구절을 처음 이렇게 해석했다. 삶의 과잉은 뭔가 철철 흘러넘치는 이미지, 여름날 녹음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흐드러진 생명의 들판이 떠올랐다.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를 삶의 과잉이라 한 걸까? 그런데 삶은 삶이지 왜 과잉이라 한 거지? 따라오는 문장, 만취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든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잉이라는 것은 어딘가 취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지. 취한 자들은 왜 취하는가. 고통을 잊기 위해 퍼마신다. 마치 어린왕자의 술꾼처럼. 어린왕자가 술꾼에게 왜 술을 마시냐고 묻자 술꾼은 술마시는 자기가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고 했다. 술을 끊으면 술을 마시지 않을 텐데 술을 마시니 취하고 취한 자기가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취해있는 동안은 고통을 잊는다. 이것이 고통을 긍정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술독에 빠진 것처럼 만취한 상태에서 살아간다면? 이런 삶의 상태란 무얼까. 홍수처럼 쏟아지는 자극의 무더기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미지가 곧 떠오른다. 삶의 과잉이란 자극의 범람,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해 외부에서 쏟아지는 자극에 중독된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 문장,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그들은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재인식한다. 나는 이 문장을 감각을 절제하지 못하는 쾌락주의자들의 무능력함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꾸릴 힘이 없기에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낙관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스스로 필요와 불필요에 따라 제거하고, 제외하고 선택하는 역량이 없다. 그들은 그저 둥둥 떠다니거나 방향없이 흘러간다.


티베트판 윤회도에서는 12연기 중 일곱번째 수()는 대상이 감각기관을 자극하면 '느낌'이 온다는 것을 '눈에 화살이 박힌 형국'으로 그려져있다.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붓다는 "인간은 수백 개의 화살이 꽂힌 상처입은 짐승이다!"라고 했는데 화살들은 안이비설신의를 향해 시시각각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오감을 작동시키며 살아있는 한 밀실과 광장의 경계 없이 삶의 과잉에 떨어질 수 있다.


삶의 결핍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떠올릴 때 파크리트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가 떠올랐다. 그는 삶의 과잉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그의 일상은 소거된 상태다. 좀머씨는 상처받은 자다. 어디서 어떤 연유로 그런 상태가 됐는지는 모른다. 그는 삶이 두려워 삶에서 도망가려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디론가 늘 바삐 걷고 있다. 그는 한결같이 검은색 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허겁지겁 걸어다닌다. 그는 누군가 그를 도와주려고 해도 가만 좀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는 관계를 차단하면서 고집스럽게 걷기만을 계속한다. 그는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말려버리고 마비되었다. 웃음도 없고 울지도 않는다. 그럴수록 그는 더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삶에 반대되는 수단, 즉 걷기를 더 재촉한다. 이것은 삶을 위한 기도가 기도를 위한 삶으로 전도된 금욕주의 성직자들의 이미지와도 통한다. 좀머씨는 호수를 걸어서 저 너머 피안으로 갔다. 우리가 볼 때는 자살이지만 좀머씨 입장에서는 걸어서 하늘까지 간 것이다. 좀머씨에게 삶은 그 자체로 정당화 될 수 없었다.


수행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에 붓다는 거문고 줄을 너무 당겨도 안 되고 너무 늦추지도 말라고 답한다. 결국 쾌락과 금욕의 극단을 삼가하라는 뜻인데 이 중간은 수량적 중간이 아니다. 자극의 과잉과 자극의 결핍, 방만하게 몸이 하자는대로 따라가는 쾌락주의와 몸을 학대하며 정신을 수련한다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라 읽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신체와 정신을 둘로 나눠본다는 데 있다. 이 둘을 모순과 대립에 놓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삶은 고통이다. 이 둘은 맨정신으로 삶을 덤덤하게 살아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삶은 미리 주어진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를 찾기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바쳐야 한다. 하나는 방탕한 허무주의고 두번째는 지나치게 진지한 허무주의다. 하나는 삶의 무의미를 말하고 하는 삶의 의미를 말한다. 둘이 묶여있는 지점은 '의미'다. 하나는 없다는 것, 하나는 있다는 것. 전제는 같다.


전체 3

  • 2019-12-06 13:12
    채운샘 강의를 되돌려 듣다가 이 대목은 정리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나름 정리를 해봤는데요. 마이너스 샘들은 어떻게 정리하셨는지 서로 나누면 좋을 듯합니다.

  • 2019-12-07 07:03
    태양은 가장 낭비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데요. 막 퍼주잖아요. 불특정 다수의 지구상 온 생명에게 낭비적이리 만큼 베푼데요. 그리고 니체는 이런 기대심리가 없는 베품은 '자비심'과 같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해요. 즐거운 학문 서문(p.25) 중에 병든 철학자를 두 부류로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는데 난희쌤의 발췌문장이랑 비슷해요. '혹자는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혹자는 자신의 풍요로움과 활력에서 철학을 한다'고 되어 있어요. 채운쌤이 말씀하시기를 결핍된 자는 결여되었다고 느끼기에 채우고자, 기대고자하는 마음으로 철학을 하고, 풍요로움과 활력에 넘치는 철학자들은 병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 해석의 다양성 등으로 풍요로운 마음을 갖는데요. 이건 병으로부터 회복기를 맞은 니체 자신의 충만함 감정과 맞물려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해님과 같은 시기의 니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해요. '감각을 절제하지 못하는 쾌락주의자들의 무능력함을 떠올렸다'는 쌤의 말씀과는 다른걸까요? 다른 쌤들의 의견이 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삶, 그자체로 정당화되기 어려웠다는 좀머씨 이야기는 오늘 뵙고 여쭤보고 싶어요~. 이따 뵈어욤~ㅎㅎ


  • 2019-12-07 22:55
    텍스트를 오독할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지, 오독하고도 그런 양 드러내지 않으면 영원히 그런 줄 알고 다음 그 다음의 오독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걸 오늘 공부에서 배웠습니다.



    "<삶의 과잉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은 만취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처럼 고통도 긍정으로 만든다. 디오니소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그들은 제거도, 제외도, 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의 극단적인 형태를 재인식한다"

    이 구절이 바로 문제의 구절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들뢰즈는 여하간 생성의 관점을 놓치지않는다고 하시면서 '삶의 과잉'은 한 마디로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상'이라고 짚어주셨습니다. 확 깨더군요. 과잉이라는 말을 늘 쓰는 일상어로 이해하면서 온갖 이미지를 끌어대 이해해보려고 했으니까요.

    삶은 넘쳐흐릅니다. 매순간 우리의 인식 너머로( over there) 진행중입니다. 우리의 인식엔 항상 언어가 개입됩니다. 언어로 포착된 삶은 부분적이고 그나마 이미 사후적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삶의 과잉이 고통스러울까요. 무상함, 항상하지 않음이 고통스러운거죠. 삶이 무상하다. 그게 고통이다, 이것을 철두철미 깨닫을 때 '디오니오스의 사지가 찢긴 죽음'에서 우리는 '제거'도'제외'도'선택'도 불가능한 긍정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죠. 이 긍정이 얼마나 대단한 긍정인지, 가늠이 잘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