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생러시아 3학기 5주차(4.9)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0-04-03 21:38
조회
122
소생 러시아 3학기 5주차 (4/9) 공지

이번 주는 수술로 잠시 쉬었던 윤순샘도 돌아오고, 어머니가 편찮으셨던 지영샘도 와서 간만에 자리가 꽉 찼습니다. 이번 주 함께 읽은 책은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엥겔스의 저작입니다. 오전에 조별 토론을 먼저하고, 산책과 오금희를 하고 오후에 공통 텍스트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지난주 빠진 분들도 있고 조별 구성이 완전하지 않아 토론이 미비했던 부분이 있어, 맑~은 정신에 조 토론을 먼저 했지요. 조별 텍스트들이 정해지고 함께 읽고 나누니 토론이 좀 더 풍성해진 것 같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빌어 엥겔스가 사용한 말입니다. 19세기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오언, 생시몽, 푸리에 등의 사회주의 논의를, ‘현실에 토대’를 두지 않는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착취하고 잉여를 내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를 저지할 단위로 사회주의를 모색합니다. 오언은 특히 사회주의를 다리 삼아 공산주의까지 밀고 나갈 것을 주장하지만,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어서, ‘절대적 진리’로 빠져 버립니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방식은 “절대적 진리”에 의존하고 있고, 시간, 공간, 역사발전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절대적 진리’마저도 학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216) 이런 절대적 진리가 상호 충돌할 때는 절충주의를 택하며 차이를 소멸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해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해집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대량 생산 체제의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생산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변혁의 주 세력으로, 계급 투쟁의 필요성까지 밀고 가지는 않습니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현실의 토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표방한 현실이란 프롤레타리아트와 자본주의 사회 분석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주의로의 전화에 주 세력은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을 통해 사멸할 것인데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굽을 인식하고 계급 투쟁의 주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임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관은 ‘유물 사관’에 입각해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 변동과 정치적 변혁의 궁극적 원인은 인간의 두뇌 속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늘어가는 이해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양식과 교환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226) 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산 수단과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적 생산의 형태를 전제하며 생산물의 소유자로 시장에 가지고 나오는 것에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와의 대립이 상호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죠.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생산했지만 삼성의 라벨을 붙이는 순간 삼서의 소유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생산의 사적 소유권은 생산의 계획화를 배제합니다. 이윤을 내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논리가 우선하고 다국적 기업 등을 보면 국가의 통제라는 것이 무색해지지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적 생산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고, 자본의 무제한적인 힘 아래 놓이게 되어 무정부성을 띠게 된다고 엥겔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무정부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본주의는 국가를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에 복무하게 합니다. 국가는 오직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주고 실행하는 기구일 뿐입니다.

토론에서는 이런 국가의 사멸이라는 맑스 엥겔스의 테제와 아나키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현재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해 자본주의의 극한이 사회주의인데, 국가를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계급 관계를 타파하는 지점에 아나키즘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푸코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푸코는 주체도 통치도, 국가도 생산에 앞서 존재하지 않은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어떤 규칙과 절차 등이 있는지 살펴야 하며, 그 관계 안에서 주체는 생산되는 것이라고, 국가 역시 어떤 절차와 형식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지, 이를 통해 국가도 어떻게 주체화되는지만을 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이해 하고 있는 것들을 정확한 언어로 말해내기가 쉽지 않아, 재미 있게 읽고 아쉬운 토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주에는 발리바르의 해석을 통해 맑스주의의 역사에 대해 읽어 볼 예정입니다. 오늘 후기에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지 못했는데, 담주에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오래보아야 어여쁘다.

   

  다섯 동물이 되었다(오금희 체조) 시체 자세로 휴식 (?)중....;;  연산홍은 밖에서 이리 아름답고. 

  공지 읽다가 지쳤을 분들을 위해^^

## 공지입니다

# 읽을 거리는 스캔해서 숙제방에 올려놨어요. <맑스주의의 역사> 중 발췌독합니다.  읽고 얘기 나눌 키워드 뽑아 보시고, 자신의 주제글과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요.

# 간식은 혜연샘, 혜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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