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6월 24일 7회차 세미나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1-06-30 14:46
조회
66
중론 세미나 후기가 좀 늦었습니다. ^^;;   그래도 내일 10품을 토론하기에 앞서 지난 시간 저희가 공부했던 9품과 채운샘의 강의를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9품의 주제는 “먼저 존재하는 자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일단, ‘먼저 존재하는 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번역에 따라 선행주체, 근본 주체, 취자(取者), 푸드갈라 (pudgala), 자아(atman)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텍스트에 나왔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보고 듣고 감각하는 등등의 경험과 별도로 존재하는 주체라고 이해했고요. 나가르주나가 앞서 8품에서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할 수 없다고 논파했는데, 마찬가지로 9품에서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과 분리된 자성이 있는 주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자아(atman)는 보는 감관 등보다 결코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는 감관 등이 결여되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는 감관 등과 동시에 존재하는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각 별도로 성립하지 않는 것들 둘의 동시 존재는 경험적으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 존재하지 않는 토끼 뿔 두 개의 동시 존재가 관찰되지 않는 것처럼. 또한 자아라는 취자(取者)와 보는 감관 등이라는 취(取)는 상호 의존하지 않고 각각 별도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는 감관 등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감관 등보다 나중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보는 감관 등이 먼저 존재하고 자아가 나중에 존재한다면 자아는 나중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행위자 없는 행위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고찰할 때 자아는 보는 감관 등보다 먼저, 나중에, 또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의 자성(svabhava)이 인식되지 않는데 어떤 지혜로운 자가 그것의 존재성과 비존재성을 분별하겠는가? 그러므로 행위와 행위자와 마찬가지로 취(取)와 취자(取者)는 상호의존에 의하여 성립하며 자성에 의하여 성립하지 않음이 논증되었다." (찬드라키르티, 「쁘라산나빠다」 2권, 446-447)

결국 그 어떤 것도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모든 유(有)와 취(取)는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다는, 이제는 매우 익숙한(^^)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아, 그렇구나!' 하고 익숙해져 가는 게 아니라 이 논파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파악해 이 논지가 피부에 스며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에겐 골수까지 깊이 아로새겨진 분별적 구조가 있고 이 분별적 구조는 언어라는 관습에 의해 더 공고히 구축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귀류 논증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관습적 언어의 표현들이 함축하는 전제들을 부수어버립니다. 아니, 부수려고 하시죠. 저희는 자꾸만 버티고...! ㅠㅠ

우리의 관습적인 사유와 언어에서 행위와 경험의 주인인 주체를 설정하고 구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체는 행위의 주인이고 그러한 행위를 일으킨 의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모든 경험과 행위를 아우르는 근본 주체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행위자가 있고 행위자에 의해 행위가 나온다고 자연스럽게 믿습니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행위 자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맞느냐는 겁니다. 8품과 9품은 결국 같은 주제를 얘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위와 행위자, 경험과 주체는 자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직 연기적으로만 발생할 뿐이라는 것.  “나는 이것을 외우려고 했는데 외우지 못했어.” 라고 말할 때 외우지 않은 외운 자란 성립하지 않습니다. 외운다는 현행을 통해서만 외움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므로, 외우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외움의 행이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감각 경험과 주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주체, 듣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각각을 경험하는 자성적 주체가 모두 별도로 존재해야 하는,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일어납니다. 나가르주나는 작용하는 자를 떠난 작용 자체는 있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행위와 작용을 일으키는 하나의 특정한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주체는 행위의 주인이자 의도 같은 모든 심리적 작용의 주인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이 대체 왜 그렇게 행위를 했지? 행위에는 어떤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궁극적인 지점을 의도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위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게 되기도 하고, 마음 먹은 대로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의도-행위를 단편적으로 연결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엄밀히 따져서 우리에겐 하나의 행위가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과를 얘기하지만 이게 단선적인 인과가 아니죠. 무시 이래의 중중무진 인연들 속의 인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행위, 하나의 경험은 내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나의 행위와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한정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하나의 의도, 하나의 원인을 무를 뽑듯 쑥 뽑아내어 ”이것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무한한 것들과의 연결에 대한 인식 속에서만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을 뿐. 그러니 이 통찰이야말로 굉장한 지혜죠.

지금 이 자리에서의 모습과 행위로 펼쳐지는 게 나이고 그걸 떠나서는 따로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했을 수도 있는 나, 지금보다 더 못할 나에 대한 변명이나 두려움에 끄달릴 것이 아니라 지금 요 모습, 요 꼴로 있는 자신을 긍정하고 인정해야 하죠.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의 연결로서의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비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샘께선 공을 투철하게 이해한 결과는 오직 자비심이라고 하셨죠.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충만한 만큼 공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것들이 기뻐야 나도 기쁘네. 모든 것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네.'  중론 공부를 마칠 때쯤이면 이런 마음이 저절로 올라올지.... 아, 아직은 매우 매우 요원합니다.

내일 10품 각자 맡으신 발제 분량 꼼꼼히 읽어 오시고요,  지난 시간 샘께서 나누어주신 ‘게쉐 텐진 남카’의 프린트도 잊지 말고 다시 한번 읽어 보세요. 프린트의 나머지 내용은 10주 차에 이어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그럼 내일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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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30 22:00
    "하나의 행위, 하나의 경험은 내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하나의 의도, 하나의 원인을 무를 뽑듯 쑥 뽑아내어 ”이것 때문이야!“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매번 수시로 걸려넘어지는 이 지점 ~~ 휴 언제쯤 하나의 원인에 매이지 않고 넘어설까요
    바쁜 와중에도 깔끔하게 후기 정리해 주시니 바람처럼 날아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