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7월 15일 2학기 10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은주
작성일
2021-07-24 18:30
조회
121
[낭송회]
숨이 턱턱 막히는 불볕 더위 그리고 연일 치솟는 확진자로 인한 코로나 4단계 격상과 함께 불티모아팀의 2학기 마지막 수업은 시작되었습니다. 방역지침이 강화되면 이제 자연스럽게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또 그렇게 일정을 이어갑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온라인 수업이라 수술 후 몸을 회복 중인 은순샘과 근무 중 잠시 짬을 낸 은미샘을 만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2학기 마지막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채운쌤을 모시고 하는 [중론]과 [입중론] 암송이었습니다. [중론]은 분량이 짧은 반면 [입중론]은 분량이 많아 도반들이 좀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도반들께서 뜻을 새기며 낭랑하게 암송을 해주셨고, 그 기운은 길고 긴(?) 랜선을 타고 모두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채운쌤께서 저희들의 낭송 메들리에 흠뻑 빠지셨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수업 시간에 [입중론]을 낭송할 때는 어렵고 의미도 와닿지 않아 조금 힘들었는데, 암송을 하니 뭔가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해가 좀 더 된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힘들지만 암송을 하겠죠. 다 이해해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암송할 정도로 여러 번 집중해서 읽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되네요.

[채운샘 강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로서의 불교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불교를 보통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라고 얘기하곤 한다. 나 또한 불교를 접하기 전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채운샘께서는 경험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라는 단어를 불교에 접목하여 말씀해주셨다. 먼저, 불교가 태동하기 전에 인도에서 주류를 이루던 우파니샤드 베단타는 절대주의 철학이다. 베단타는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우파니샤드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유일신을 전제로 하는 절대주의 관점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학자들은 유일신을 인간의 인지작용과 관련지어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는 변치 않는 무엇인가를 상정한다. 궁극적인 실재, 영원불변의 본질 등을 버리기가 쉽지 않으며, 이러한 사고는 인간의 뇌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에서 의학과 교수인 저자들은 인간의 뇌가 어떻게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을 만들어내는지를 탐구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세계에서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경험 세계 바깥에 초월적인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가 초월적인 것을 성립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담당하는 뇌의 손상이 있으면 초월적인 것도 사라진다. 일본의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또한 유일신이 탄생되는 종교적 사고의 발생과정을 탐구하면서, 유일신이란 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사유의 발전에 있어서 고도의 추상성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초월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유일신은 실은 인간의 사고 작용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초월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불교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경험세계 바깥에 경험 세계 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때로 불교의 공(空)은 초월적 세계나 경험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치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은 현상 너머의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다. 공은 우주 만물의 원리인 성리학의 리(理)나 서양의 유일신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은 어떤 원리가 아니라 경험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용어로 볼 수 있다. 채운쌤은 [중론]을 공부하면 공이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공은 원리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연기를 말하며, ‘나’와 ‘너’가 있고 그런 우리가 서로 의존하여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용수는 [중론]을 통해 누누이 존재하는 것이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이 존재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중론]은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를 인정하면서도 또한 ‘존재’를 상정한 아비달마(부파불교)의 잘못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비달마를 잠시 살펴보자. 아비달마는 불교가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벗어나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다듬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설일체유부와 경략부는 아비달마의 강력한 부파들로, 이들 논사들은 무상하게 변화하는 경험세계에서도 무엇인가 연속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뭔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연속적이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고, 궁극적 요소들이 있기에 연속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설일체유부는 궁극적이 요소, 즉 법(다르마)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현상이란 모든 것들이 영원불변의 법에 의존하여 나타난 것이다. 반면에 경량부는 현상 자체는 공하다고 보았다. 법은 실존하지 않으며, 형상들도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현상이 연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푸드갈라, 즉 궁극적 주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용수는 [중론]에서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궁극적 실체를 상정하는 절대주의를 부정한다. 아비달마는 인도 철학의 절대주의를 부정하면서도 또 다시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떠한 것도 자성이 없다. 인식의 대상도 인식의 주체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존재하는 것이란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은 공한 것으로, 영원불변하는 존재란 공이란 말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인가에 의해 연기해서 존재한다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 사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연기의 결과이다. [중론] 10장, “불과 땔감에 대한 고찰”에서도 용수는 불과 땔감이 따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서로를 의존할 때 불과 땔감이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존재들이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상주론과 단멸론도 부정하셨다. 경험세계에서는 영원히 머무르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없다. 경험세계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동하는 세계로, 무엇인가가 계속 존재하는 상주론은 불가능하며, 또한 무엇인가가 완전히 사라지는 단멸론도 불가능하다. 단멸이라면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있다면(존재), 그것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겠는가? 존재하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거나, 사라지거나,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로 인해 어떤 것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연기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초월적인 세계나 신비주의를 부정하셨다. 이 경험 세계 이외에 어떤 세계도 없다.

부처님은 또한 이 경험세계에서 인간이 겪는 고에 주목하셨다. 인간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고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고, 그러한 고의 벗어남에 어떠한 것이 유용한가를 고민하셨다. 채운쌤은 [법구경]이 당신 인도에 만연한 베단타 철학과 대결하는 것으로, 불교의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노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적 측면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불교의 근본을 현상 너머의 이상세계에 대한 갈구나 공을 무상한 현실과 반대되는 개념이나 경험세계를 포괄해서 보여주는 한 차원 높은 관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상은 상호의존하여 드러나는 끊임없는 변화이며 운동이고, 대상이 있고, 인식주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실은 연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이라고 일컫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진공묘유?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원래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 실험을 고안했는데, 역설적으로 양자역학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실험에서 슈뢰딩거는 밀폐된 상자 속에 독극물과 함께 고양이를 넣고 고양이의 생존여부를 타진한다. 고양이가 살 수 있는 확률과 죽을 수 확률는 반반이다. 그럼, 우리는 상자 밖에서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고양이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박스를 열고 관찰해야 한다. 이 실험에서 ‘관찰’은 중요한 의미를 띄는데, 이것은 결과를 좌우하는 행위가 된다. 다시 말해 고양이의 생사는 우리가 그것을 열어봤을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스를 열기 전의 고양이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중첩은 경험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상태는 진공상태로 이것은 어떤 물질도 상호작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며, 이것에 의해 저것이 관측되고, 저것에 의해 이것이 관측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과 상호작용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생각할 때,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파동이다. 하지만 관측을 하는 순간, 파동이 입자로 포착된다. 파동이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라는 것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은 파동인데, 관측할 때 그것이 입자로 존재한다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관측은 누가 하는가? 사람만이 관측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며 관측하고 관측의 대상이 된다.

양자역학의 죽음과 삶이 중첩된 상태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와 유사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운동과 변화로 풀어쓸 수 있다. 모든 것은 자성이 없으며, 파동의 상태에서 연기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한 예로 내가 연필을 보는 경우, 내가 연필을 관측하고 또한 연필이 나를 관측한다고 할 수 있다. 연필에 의해 나는 관측하는 사람으로 포착된다. 그러나 파리는 인간이 볼펜을 관측하는 방식으로 관측하지 않을 것이다. 파리에게 볼펜이 관측되지 않으면 볼펜은 그냥 파동일 뿐이다. 존재가 있어 상호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기 속에서 이것은 이것으로 또 저것은 저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채운쌤은 불교의 ‘연기’는 물리학 용어로는 ‘상호작용’이라고 말한다.

[중론], 제12장. 고에 대한 고찰 (채운쌤 강의)

‘고통은 자기에 의하여 지어진다. 고통은 타자에 의하여 지어진다.

고통은 양자에 의하여 지어진다. 고통은 양자에 의하여 지어진다.

고통은 무원인이다.’라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어진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불교에서는 자책할 필요가 없다. 고통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기에 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러나 분명 고는 있다. 무엇이 고의 원인인가? 무엇을 특정 짓기 보다는 고는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예로, 내가 길동이는 나쁜 아이라고 생각할 경우, 나쁜 아이라는 실체는 없다. 내가 그를 나쁜 애로 ‘포착’한 것이다. 양자역학 용어를 빌리면, ‘나쁜 길동이’는 상호작용의 결과로 그것은 포착된 입자에 불과하다. 우리의 고가 파동을 입자로 포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습관적 사고패턴은 내가 포착한 것을 세계라고 믿는다. 고를 실체화하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해진다. 채운쌤은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의 장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럼 어떻게 경험의 장을 바꿀 것인가?  내가 끊임없이 분별하고 실체화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중론]에서 용수의 핵심도 우리가 어디에서 실체화하고 있는지를 파헤치는 것이다.

불교에는 어떤 것도 그 자체의 존재가 없다. 양자역학식으로는 입자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자도 불리는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입자의 세계와 파동의 세계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 하나의 세계이다. 관측하면 입자요, 아니면 파동이다. 입자들로 가득 찬 이 세계 안에 이미 입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중첩된 세계도 하나의 세계이다. 부처님은 그것이 진공묘유라는 것을 아셨다. 법도 없고 대상도 없고, 원자도 없고, 인식주체 같은 것도 없다. 연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하는 것처럼 만들어낸 허구가 있을 뿐이다. 이 세계는 연속하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중첩된 상태로 있는 ‘적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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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론]을 읽으며, 그동안 익숙했던 세계가 실체가 아님을 계속해서 깨우치며 습관적인 포착방식을 되돌아보고 중첩된 다른 세계에 대한 접속을 시도합니다. 채운쌤께서는 [중론]이 이해가 안 되도 읽고 또 읽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읽고 또 읽다 보면 우리 앞에 굳건하게 서 있는 세계가 실은 내가 포착한 입자들의 구축임을 몸으로 마음으로 찐하게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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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12품 발제 순서

1-  설

2,3  - 은주

4,5  - 윤지

6 -  경아

7 -  길

8 - 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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