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2학기 10주차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01 18:46
조회
84
폭염이 살짝 주춤하고 비가 오는 일요일, 저희 절탁 일요반은 또 활기찬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이것은 아직 그 열기가 가시지 않은 따끈따끈한 후기구요. 격무(상반기 결산?)에 시달리시는 수경샘의 빈자리가 무척 크구나,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곧 이어진 낭송과 암송의 열기가 굉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드디어 <윤리학> 2부를 다 읽었거든요! 10시부터 11시까지 한 시간을 낭송하다보면 정신이 몽롱해지곤 합는데요, 그런 와중에 중간중간 <스피노자의 동물우화>에서 읽었던 대목이 등장하면 무척 반가웠습니다. 자기 집 뜰로 날아든 이웃집 닭이라던가, 뷔리당의 당나귀라던가, 날개 달린 말이라던가요. 새삼 스피노자는 그 어려운 내용을 쓰면서도 갖가지 예시들을 빼놓지 않고 섬세하게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뭉클(?)했습니다. 물론 그것들 역시 반론의 여지 없이 신중하긴 합니다. 긴 주석들을 건너서 어찌어찌 2부를 끝냈다는 기쁨과 함께 저희의 암송은 일취월장한 성취를 이루었는데요. 이제 다섯 줄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삼십 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열둘 열세 줄을 거뜬히 외워버리는 경지에 이르러버렸죠. 특히 반장 건화형과 틴에이져 이우의 암기력이 빛이 난답니다.

오후 시간에는 써 온 공통과제를 읽고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16, 17, 18장을 토론했습니다. 먼저, 연주샘의 과제로부터 선과 악과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부터 저희는 함께 살아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선과 악은 그 자체로(선험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의 본성대로 욕망하고 생각하고 행위 할 뿐이죠. 여기서 잠깐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것을 개개인 혹은 독특한 실재들 각각의 고유한 개성이나 특질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코나투스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고자 하는 생명의 일반적 본질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광의나 협의냐의 질문이었는데요, 문맥에 따라 다르겠지만 에티카 안에서는 후자의 보편적 본성을 말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본성과 선악에 대한 이 이야기는 <동물우화> 18장에 소개된 니체의 독수리와 어린 양의 우화로 이어졌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서 양을 잡아먹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그러나 양은 그런 독수리를 ‘악하다’고 비난합니다. 우스워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저희가 자주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 혹은 사건들의 사유와 행위의 작동방식과 인과관계를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때 우리는 쉽게 그것을 악하다고 간주하고 동시에 그런 일을 하지 않은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덧붙인 그런 “악은 서로 다른 본성 간의 양립 불가능성의 표시일 뿐”(104쪽)이며 오해와 비방하려는 의지의 산물일 뿐이지요. 그럴 때 양은 제자리에서 손가락질을 할 뿐입니다. 어떻게 도망갈지, 어떻게 자신의 네 발 및 귀와 눈을 활용할지 고민하지 않지요. 그 자리에는 원한이 들어섭니다. 하물며 자신이 먹는 풀에 대해서 혹은 더 큰 생명의 연관관계 망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은 더 없게 되지요. 그래서 저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것을 ‘악’으로 설정하는 일의 진짜 문제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과의 관계를 다르게 맺으려 이런저런 시도들과 여지를 없앴다는 점에 있겠구나! 실존을 다르게 바꿔보고 넓게 이해해보는 시도를 차단하는 것이겠구나!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이우, 훈샘, 건화형 과제의 주제는 자유였는데요. 그 핵심은 자유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다르게 생각하기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유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능과 동일시하곤 합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부자가, 왕이, 신이 가장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이나 돈이나 법이나 타인의 의사로부터 제지받지 않고 해방된 상태로서의 자유. 그러나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에는 이미 그런 해방-자유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되면 뭐할 건데?”라는 질문이죠. 신분상으로 이미 자유인인데, 어떤 억압도 없는데, 노예처럼 살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외부의 압력들로부터 해방된 상태여도 그 일상의 행위나 마음작용에 있어서 충분히 노예적일 수 있습니다. 초점은 오로지 매 순간의 일상적 실천과 행위 속에서 표현되는 양식들 속에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절제된 삶의 형태가 가장 자유로울지도 모르죠. 저희는 저희의 상식과 맞서 ‘해방되지 않으면, 즉 여러 외부적 압력들이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나?’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자유가 ‘~로부터의 해방’으로 규정되는 한에서는 그 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자살함으로서 신적인 자유에 이르겠다는 어느 무신론자의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억압을 전제하는 자유는 시작부터가 꽤나 부정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지요.

이런 수동적 자유의 규정과 관련하여 저희는 “구원은 악에 대한 공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103쪽)라는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어떤 것을 긍정하고 결단한다는 문제는 저쪽의 틀리고 잘못된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닙니다. ‘스피노자의 결단’이라고 불리는 철학하는 삶으로의 결단 장면도 그렇습니다. 그는 돈과 명예와 성욕의 추구로 요약되는 ‘통상적인 선’을 추구하는 삶이 확실한 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철학하는 삶을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한쪽을 고른다고 다른 쪽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비방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스피노자는 돈 명예 성욕의 영역이 다른 것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통상적 가치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저의 과제의 주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저희의 논의는 ‘기본적인 생계 수준’ 등으로 흘러가기도 했습니다. 최저시급의 문제가 설정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했지요(린스는 생필품인가 사치품인가?). 국가에서는 객관적인 표준을 도출해내려 하기 때문에 그런 기준을 설정하지만 사실상 이것들은 추상적입니다. 통상적 가치들이 수단이 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해될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목표가 되는 선은 자신의 존재와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활동(혹은 그렇게 공부-수행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그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주거, 식사, 연애 등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으며 그때는 정말 나에게 얼마만한 돈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유한 활동에 고유한 생활의 재편이 이뤄지지 않으면 막연한 다다익선으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늘 불만족스럽죠.

저는 요즘 어떻게 현재의 공부하는 삶을 밥벌이와 연관시킬 수 있을까의 문제를 처음으로(놀랍게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올해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지금도 둘은 별개의 문제였고 저는 밥벌이의 문제를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결단,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긍정하는 방식으로부터의 결단을 보면서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측면에서 두 길을 대립적인 것도, 한쪽을 적대하는 것도 아닌 방식으로 공부를 해갈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다음 주에는 19, 20, 21장을 읽고 공통과제 해옵니다! 일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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