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2학기 12주차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20 20:43
조회
73
절차탁마 서양기초 3학기도 어느덧 막바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 12주차 세미나를 했고, 이제 두 번의 세미나를 남겨두고 있네요. 지난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22~24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는데요, 무언가가 반복되는듯하지만 뾰족하게 잡히지 않는 챕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공통과제에 좀더 다양한 주제들이 담기는 신기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좋아?)

연주샘은 지난주부터 꽂혀 있던 ‘원인에 의한 사유’를 주제로 본인이 겪은 일상의 사건을 풀어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타고난 습성이기도 한 ‘원인에 대한 무지’를 자주 꼬집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욕구한다는 것은 의식하지만, 스스로를 욕구하도록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죠. 무지하기만 하다면 다행이겠건만,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로부터 왜곡된 관념들을 형성합니다. 자신에게 한 번 또는 몇 번 이익을 가져다준 것을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한 번 또는 몇 번 손해를 끼친 것을 그 자체로 악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죠. 무지하기 때문에 더욱 당당하게(!) 선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합니다. 어떤 것이 나에게 작용한 ‘결과’를 바탕으로 인과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를 사로잡는 정념의 힘을 극대화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결과에 입각한 인식이 아닌 원인으로부터의 사유란 무엇일까요? 연주샘은 우선 무엇이 원인에 의한 사유가 아닌지를 분명히 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나에게 어떤 정서나 욕구 등등이 작동하게 된 원인들을 모조리 파악하는 것. 아니면 원인을 끊임없이 따져 물어 되짚어가는 것. 이런 것은 원인에 의한 사유가 아닙니다. 결과와 분리된 독립적 실체로서의 원인을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적 관점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인과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죠. 스피노자에게는 “자연 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윤리학, 2부 정리 13의 보조정리 7의 주석)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원인을 계속해서 따지다보면 우리는 ‘우주의 탄생’에 이르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이 세계의 배후에 어떤 신비한 의지나 인격 같은 것을 설정하게 될 것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역량이란 변용될 수 있는 역량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정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신체입니다. 그리고 그 신체는 “그것의 내적인 구조만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그 신체의 환경을 이루고 있는 신체들과 맺는 관계에 의해 정의”(62쪽)됩니다. 정해진 몇몇 대상과 익숙한 방식으로만 관계하는 신체는 존재할 수 있는 힘을 덜 가질 것이고, 반대로 다양한 것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갈 수 있는 힘이 큰 신체는 존재역량을 더 많이 가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이 개의 정신보다 우월하다면,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개의 신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할 수 있는 변용능력(탈영토화의 여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성은 뇌의 크기가 아니라 신체의 유연성에 달려 있다는 것(물론 이때 유연성이란 다리찢기를 잘 한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의 사물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합치를 이룰 수 있는 잠재성 같은 것입니다).

원인으로부터 사유한다는 것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는 정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또 확장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모든 것을 주어진 규약에 따라 허용과 금지의 체계 안에서 이해하는 정신은 변용의 능력이 한참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에게 삶은 마치 선행 포인트를 더 많이 쌓고 악행 포인트를 적게 쌓는 증강현실 게임과 같을 것이고, 주어진 규약에 대해 질문하거나 그것을 변형하거나 다른 차원에서 그것들을 이해해볼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죠. 규약에 따라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원칙도 없이 되는대로 사는 사람도 변용의 역량은 매우 낮은 수준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습관이나 그 순간의 상황이 규정하는 바대로 행위 할 뿐이고, 그런 한에서 그는 가장 가까운 원인과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만 관계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사유의 역량이 크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습관적인 해석이나 판단에 머무르지 않는 사유의 운동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질문을 하는 것, 다르게 해석하고자 시도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규정하는 원인들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 이것이 정신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고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요. 연주샘은 ‘나아감’이라고 쓰셨는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한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정신이 자연을 그 자체로 조망할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듯 ‘원인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태생적인 조건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쾌나 불쾌를 일으키지 않는 한 그것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판단’에서 시작하는 셈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교정하는 일 뿐이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리 많은 원인들을 따져본다고 한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어떤 것에 의해 변용된 결과에서 출발하여 역추적한 원인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을 늘린다고 우리의 해석이 확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우리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판단에 딴지를 걸어보는 게 아닐까 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당함, 당연함, 익숙함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스피노자의 철학이 머리 아픈 것은 바로 이것을, 지성의 교정을 촉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분명 다른 분들의 과제도 언급하면서 후기를 써보려고 했는데, ‘원인에 의한 사유’가 잘 풀리지 않아서 주절주절 늘어놓다보니 연주샘 글만 언급하게 되었네요. 저는 시기심에 대해서 민호는 신자유주의와 우울증에 대해서 썼는데, 저희 둘의 글은 약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경샘은 스피노자는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문제에 대해 글을 쓰셨는데, 이 질문은 사실 스피노자에게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문제라면, 그에게 좋음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되는가 하는 질문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현정샘이 스피노자의 관개체성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해주셨구요. 훈샘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 규정당하는 삶과 자신의 본성에 따르는 삶에 대해 써 주셨는데, 샘의 고민은 드러나지만 계속해서 같은 구도 (‘사회에 의해 길들여진’ VS ‘진정한 나 자신의’ 같은 느낌의...)가 반복되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습니다.

다음주에는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25~27장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과제를 쓰실 때 마지막 주차에 쓸 마무리 에세이의 주제를 무엇으로 잡을지 간략히 적어 와주세요. 그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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