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2학기 14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26 16:37
조회
133
이번 주에는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25~27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오전 낭송은 《윤리학》 3부 막바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냥 어려웠던 1, 2부에 비해서 3부에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구절들이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자유롭다고 상상하는 것에 대한 사랑과 미움은, 동등한 원인이 주어져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인 것에 대한 사랑과 미움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윤리학》, 3부 정리 49)라는 구절은 어째서 원인에 대한 인식의 결여가 우리의 미움을 키우게 되는지를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를 문제 삼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정념을 키울 뿐이라는 것도요. “어떤 이를 미워한다는 것은, (3부 정리 13의 주석에 의해) 그 사람을 슬픔의 원인으로 상상한다는 것이다.”(《윤리학》, 3부 정리 39의 증명) 같은 비교적 평이한(?) 구절도 저는 눈에 들어왔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에 사실은 얼마나 많은 판단들이 내포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암송을 했던 3부 정리 56의 주석에서 스피노자는 식탐, 음주욕, 성욕, 탐욕, 암비치오를 언급하면서 이것들은 “사랑이나 욕망에 대한 통념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이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의 다양한 작용들 중 두드러지는 이 몇 가지만을 인지하고서 그것이 사랑과 욕망의 본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지적에 따르면 이것들은 사랑이나 욕망의 본성을 “이 정서들이 관계를 맺는 대상들을 통해 설명한다”라고 지적합니다. 즉 ‘사랑’이란 무엇이고 ‘욕망’이란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죠. 가령 식탐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보여줄 뿐입니다. 즉 음식이라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욕망을 파악한 결과인 것이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사랑이고 욕망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무언가를 먹지 않기를 결정하는 것도,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고자 하는 것도,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도 모두 욕망과 사랑의 양태들입니다. 욕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이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욕망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물들이나 표상들에 사로잡히지 않는 욕망의 활용을 실험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자면 특정한 인과나 결론,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사유의 역량을 길러야 할 테고요.

오후 토론은 훈샘이 쏘아올린 작은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훈샘은 인식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 써 주셨는데요, 말하자면 인식과 실천의 괴리에 관한 고전적인(?) 문제제기였습니다. 왜 생태학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생태적 실천이 뒤따라오지 않는가 하는 고민. 훈샘은 인식만이 아니라 추가적인 훈련(수행)이 필요하다는 뉘앙스로 결말을 지으셨으나, 다른 멤버들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리엘 수아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의 역량은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즉 정신의 역량은 신체에 대해 행사되는 자유 의지가 아니라 이해하는 역량에 의해서만 정의된다.”(136쪽) 도덕주의자는 정신과 신체, 의지와 욕망을 분열시킵니다. 그에게 신체와 욕망이 조련되어야 할 개라면, 정신과 의지는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인입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정신의 역량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자신의 신체와 욕망에 강요하는 힘에 의해 정의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구도로 인식과 실천을 이해하곤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가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의지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인식과 실천은 이미 일치되어 있습니다. 정신과 신체는 평행하게 신의 속성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아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걸까요? 말하자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형성한 관념 자체의 역량이 충분히 크지 못하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대개 특정한 결론을 갖고 있을 뿐, 그것을 원리의 차원에서 통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문제가 그렇죠. 우리는 여러 가지 수치와 지표를 통해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앎을 우리 자신의 존재와 결부시키지는 못하죠. 우리가 자연을 착취할 때 어떤 방식으로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을 착취하게 되는지, 우리가 사물들과 맺는 관계가 산업적 생산과 더불어 어떤 방식으로 치우쳐졌으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에 우리의 경험과 감각과 기억과 우리의 전 존재를 비추어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하고 입체적인 관념을 형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할 수 있을까요?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완벽한 이론을 탐구하면 뿅 하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마주침들에 열려 있음으로 해서만, 우리는 더욱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정신으로 환원하는 사고방식도, 신체로 환원하는 사고방식도 스피노자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인식과 감각을 동시에 변형하는 문제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인식과 실천의 괴리를 느낄 때 그것을 끝까지 사유해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정신을 심판하고 신체를 죄악시하는 식으로 자기 안에 분열을 만들어내는 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 역량의 확장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주는 2학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각자 짧은 에세이를 써 오기로 했죠. 그럼 다들 건투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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