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3학기 다섯 번째 시간(08.27)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26 14:57
조회
69
세네카의 《인생에 관하여》는 총 12챕터로 되어 있는 책인데, 놀랍게도 이 열두 개의 장은 모두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네카는 상대의 질문에 답하거나, 상대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필요한 조언이나 위로를 건넵니다. 그 가운데에는 이제 막 철학적인 삶으로 전향한 세레누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있고, 동생을 잃은 폴뤼비우스나 세네카의 어머니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도 있습니다.

수신자가 분명한 글이다 보니 세네카의 글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기보다는 문제 상황이나 특정 주제에 관련하여 수신자에게 적합하다고 판단된 가르침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세미나 도중 자주 언급된 것처럼) ‘좋은 말씀’으로 읽힐 우려가 있습니다. 진지하게 연구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머리맡에 두고 종종 꺼내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세네카의 실용적이 조언들 속에 분명히 깊이 생각해볼만한 사유의 재료들이 가득하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번에 읽은 7~12권 가운데 8권 ‘은둔에 관하여’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여기에서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간단치 않은 통찰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각자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 타인들에게 유익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들에게 유익을 행할 준비이기 때문입니다.”(253쪽) 이 부분을 가지고 우리는 인식과 실천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전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죠. 우리는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것과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각각 별개의 영역에 속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을 누르고 타인들과 경쟁하여 더 많은 것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타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에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죠.

여기에는 자신의 이로움과 타인의 이로움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덕을 기르는 것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맡기고, 타인을 위하는 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의무나 반응적인 연민의 정서에 호소하는 식이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그렇듯이,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스스로의 정서와 욕망을 다스릴 줄 모르는 자가 공명심에 이끌려 타인을 위하겠다고 나설 때, 그것은 자주 상호적인 무력화로 이어지곤 합니다.

세네카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은둔하는 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자신과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힘쓰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한 가지 관점은, 나와 타자들의 관계를 좁은 의미의 지역이나 국가에 한정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 속해있긴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지금 이 사회가 규정한 방식으로 당장의 이 시공간 안에서 헌신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은 많은 것들의 덕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산하지 않은 음식과 옷과 우리가 스스로 짓지 않은 건물과 온갖 인프라들, 그리고 과거의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바친 사유가 담긴 텍스트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많은 부분 무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국가나 종교가 규정하는 바에 따라 이러한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세네카에 따르면 우리는 ‘큰 국가’를 위해 힘쓰기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입은 덕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갚아줄 것인지를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방식은 공적 업무에 헌신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덕이란 무엇인지, 덕은 하나인지 여럿인지, 인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자연인지 기술인지, 바다와 땅 그리고 바다와 땅을 포괄하는 것은 하나인지 아니면 신이 그와 같은 것을 여럿 뿌려 놓았는지, 만물을 생성하는 모든 질료는 연속해 있고 가득 차 있는지 아니면 분리되어 허공과 뒤섞여 있는지”(253~254쪽) 등등을 탐구함으로써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유익을 아직 알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헌신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스토아주의자들이 좋하는 카토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은 곧 불행한 것이고 슬픈 것이며 우리가 거기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당연함’을 의심하도록 하는 낯선 모델을 제공합니다. 세네카가 자신의 불행을 긍정하고 극복하는 방식, 그가 다른 이들의 슬픔에 대해 제공하는 충고, 그리고 그가 묘사하는 현자의 행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실존과 관계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들을 발견하도록 해줍니다. 그러니까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구원,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행한 실험들과 시도들은 우리에게 돌아와서 우리 자신의 실존을 조형하기 위한 재료가 됩니다. 어쩌면 세네카는 자신의 덕을 기르는 것이 그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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