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3학기 여섯번째 시간(9.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9-01 13:32
조회
67
지난 시간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집》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와 〈신성한 질병에 관하여〉를 읽었는데, 공통적인 평은 ‘생각보다 너무 재밌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텍스트들은 의학과 지리학과 기상학과 인류학을 섞어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는 그가 병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는 단순히 인간의 육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관계 맺고 있는 제반 환경 및 관습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들 각각은 자연적 기원을 지니며 어떤 질병도 자연적 기원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77쪽)라고 말합니다. 즉 질병은 환자가 자신의 고장의 지리적 조건과, 바람의 방향과, 계절의 변화와, 물의 성질과, 또 관습의 영향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들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질병의 계기적 원인을 제거하거나 수술을 통해 환부를 도려내고 약 처방으로 증상을 완화하는 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하는 의사는 질병의 자연적 기원을 파악해야 합니다.

니체와 푸코는 자신들의 작업을 의사의 활동에 빗대어 설명하곤 하는데요, 저는 히포크라테스를 읽으며 이것이 사실 비유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히포크라테스식의 의학을 ‘원인의 탐구’라고 (마음대로) 규정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원인’이란 결과와 분리된 타동적 원인이 아닙니다. 히포크라테스를 따르는 의사는 낯선 고장에 도착하면 그곳의 계절의 변화는 어떠한지, 바람의 방향이 어떤지, 물의 상태는 어떠한지, 또 사람들의 관습은 그들의 섭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도 각각을 독립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총체적인 삶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현대인들이 그렇게 하듯 환경을 마치 객체처럼 취급하면서 몇몇 수치와 지표에 따라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재방식과 분리될 수 없는 그들의 삶의 조건을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징후가 드러나게 된 필연적 조건을 파악하는 것.

푸코는 “니체에게, 철학은 무엇보다도 진단”(미셸 푸코, 《상당한 위험》, 34쪽)이었다고 말합니다. 니체와 푸코에게 철학이란 진단인데, 이때 진단이란 표면에 드러난 시대적 징후들을 이렇게 저렇게 가치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적극적이거나 반응적인 힘의 발현을, 인식과 삶의 조건을 포착해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적 의사의 작업과 일치합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로서 자신이 구성하는 앎과 질병에 관한 미신적인 앎을 대립시키는데, 이때 대립은 한쪽을 진리로 다른 쪽을 오류로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병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돌팔이들은 병을 실체화하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기교와 요술을 부립니다. 반면 진정한 의사는 병을 원인들의 차원에서 이해하며 그러한 이해로부터 어떤 식으로 환자의 증상에 적절하게 개입해야 할지를 고민할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집》을 읽다보니 새삼 푸코가 사료들에 접근하는 방식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플라톤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대화편들과 크세노폰의 도덕적 교훈을 담은 회상록,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서를 하나의 문제의식을 통해 관통시킵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분석할 영역은 품위 있게 행동하기 위한 규칙, 의견, 충고를 제시하겠다고 주장하는 문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헌들은 사람들이 읽고, 배우고, 깊이 생각하고, 사용하고, 시험하라고 만들어졌으며, 궁극적으로 일상적 행동의 골격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때문에 그것 자체로 ‘실천’의 대상이 되는 ‘실천적’ 문헌들인 것이다.”(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33쪽) 푸코에게 고대의 의학서와 철학서, 도덕적 교훈을 담은 텍스트 등등은 모두 ‘실천적’ 문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푸코가 그 문헌들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이 문제를 설정하고 실천들을 조직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푸코의 이러한 독특한 관점을 놓치지 않고 나머지 텍스트들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히포크라테스 선집》을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그럼 금요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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