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3/ 3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8-29 21:30
조회
62
이번 주에는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대화편으로, 죽기 직전 소크라테스가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큰 주제는 ‘죽음에 대한 긍정’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이자 친구인 심미아스, 케베스와 대화를 나누며 어째서 죽음은 긍정할 만한 일인지, 철학자는 어떻게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지를 증명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논변을 입증합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곁을 지킨 파이돈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던 에케크라테스에게 그날의 일들과 오간 말들을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요, 저는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 자신이 느낀 바를 전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파이돈은 “친한 사람의 죽음 곁에 있는 것 같은 연민의 감정”(23쪽)이 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행복해보이고, 태도나 말에 있어서 의연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전혀 생겨나지 않았더라는 것이죠.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채운샘이 들뢰즈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들뢰즈의 친구도 파이돈과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들뢰즈가 너무나 생을 긍정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는 그런 말이었는데요.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죽음을 긍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미지를 깨주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이죠.

《파이돈》에는 플라톤의 잘 알려진 철학적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영혼불멸설이죠. 저는 이 개념이 철학적 삶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플라톤은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며,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풀려나는 정화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허무주의적인 주장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육체를 벗어난 순수한 상태를 꿈꾸는 이상주의. 이는 자칫 잘못하면 생성변화하는 이 세계를 타락한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허무주의적 사고로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분명, 영혼이 불멸할 것이니 내세를 기다리라거나, 육체와 감각의 세계는 부정한 것이니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에게서 영혼과 육체의 대립은, 철학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 및 욕망과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즐거움과 고통은 “몸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참이라고 여기도록”(82쪽) 만듭니다. 플라톤이 경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각적인 감각의 자극과 외부 사물로부터 촉발되는 변화무쌍한 충동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의해 지배된 상태에서 우리가 구성하는 관념들. 이것들이 ‘전부’이고 ‘참’이라고 여기게 되는 위태로운 삶. 플라톤은 ‘영혼’을 말함으로써 다른 삶의 원리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주에는 《향연》(아카넷)을 105쪽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그럼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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