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3 : 5주차(9.23)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9-21 17:22
조회
124
진부하고, 심지어 조금 오글거리기까지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좀더 질문을 구체화하자면, 사랑은 소유욕이나 집착과는 다른 것일까요?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연설자들이 에로스에게 바치는 찬미를 함께 읽었습니다. 각자의 논점은 모두 달랐으나, 소크라테스의 불만은 이들이 찬미 대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는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에로스(사랑)을 돋보이게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인 사랑은 많은 경우 증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 무시무시한 폭력이 이루어지곤 하죠.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만족감을 사랑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대상이 우리에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쾌감을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선사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은 쉽게 그 대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강제하려는 열망으로 바뀌고, 또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대상에 대한 증오로 옮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사랑으로 변용되었던 외부 대상에 대해 더욱 커다란 미움으로 변용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겠죠.

또 우리는 사랑을 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하는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다양한 위험이 존재할 것인데, 주체를 사랑의 대상과의 배타적인 관계에 고립시킬 수 있는 위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종종 담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담배의 많은 부작용들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담배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그것에 대한 의존이 저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순간들을 모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중독이 그러하겠죠. 피로하거나 권태롭거나 공허하거나. 그것이 무엇이건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면 저는 담배 생각이 납니다. 담배를 피우면 그 순간 혹은 그러한 제 상태를 약간이나마 회피할 수 있으니까요. 아리스토파네스적 의미의 사랑은, 다양한 것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를 한 대상과의 의존적 관계 안에 고립시킬 위험을 지닙니다. 사랑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중독적 의존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 그럼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좋은 것에 대한 열망이라고 말합니다. 그 좋은 것이란 아름다운 육체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행실이나 아름다운 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움 그 자체겠죠. 그에 따르면 이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성에 참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좋은 것들과 만남으로써 그 안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아름다움과 덕에 관한 이야기들을 출산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마사 누스바움은 이것을 ‘명상적 창조성’이라고 말하며,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세속적 사랑의 애증병존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설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랑은 아가톤이 말하는 것처럼 우아하지 않습니다. 좋음을 추구하는 자인 에로스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좋음을 결여하고 있는 자이며 우아하게 사랑을 받는 섬섬한 발의 소유자가 아니라 늘 고통스럽게 스스로의 상태를 극복하고 이행해가는 존재입니다. 에로스는 피부가 딱딱하고 거칠며 맨발에 집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열망으로 (마치 출산을 욕망하는 짐승들이 그렇듯) “끔찍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우선 사랑을, 우리가 느끼는 즉각적인 쾌감, 안락함, 합일에 대한 느낌, 대상과의 낭만적인 동일시 같은 것들로부터 떼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종의 자기극복을 위한 수행의 과정과 연관시킵니다. 플라톤은 달콤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지만 지속적이고 일관된 사랑의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스피노자는 사랑이 외부 대상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수동적 정념이라 말하면서도 사랑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일관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제가 갔던 명상 센터에서도 집착은 혐오와 짝을 이룬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존재에 대한 커다란 사랑과 자비심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사랑의 차이는 뭘까요? 하나는 감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걸까요? 우리는 여기서 육체와 정신의 지겨운 이분법을 다시 살려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저는 그 보다는 두 가지 상이한 기쁨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네요. 특정한 쾌감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재활성화시키는 데에 의존하는 반응적 기쁨과 우리 자신의 실존을 변형시키도록 이끄는 좀더 어려운 기쁨. 분명한 것은 후자가 우리에게 외부적 조건이나 규정된 상태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적인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드디어 《국가》를 읽습니다. 서광사에서 나온 책의 1, 2권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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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1 19:44
    마지막의 두번째기쁨, 자비심, 스피노자가 말하는, 외부의존적이지 않은 지속적인 사랑이 점점 궁금해지네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그 이해를 위해 공부를 해가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