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숙제방

장자 시즌2 6주차 메모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7-30 08:57
조회
35
  1. 7. 30 금요일 / 장자 6주차 메모 / 박규창


 

국가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다수의 역사학자와 달리, 초기 국가의 주민에게는 국가 중심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오히려 건강과 안전에 더 요긴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최초의 국가들이 성립된 뒤에도 수천 년 동안 국가 중심의 외부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삶의 질이 더 나았던 만큼 계속 그렇게 살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17)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클라스트르가 원시부족의 정치권력을 분석함으로써 국가를 진보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밝혔듯이, 비슷하게 《농경의 배심》에서 제임스도 국가가 더 나은 삶의 형태라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제임스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 일련의 역사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가지의 질문을 제기한다. 수렵·채집하던 인류는 언제부터 어떤 조건 속에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됐을까? 정착 생활을 인류에게 ‘어떤 풍요로움’을 안겨다 주었을까?(cf. 《간디의 물레》) 정착 생활과 연관해서 정당화되는 국가는 도대체 어떤 정치 권력을 작동시키고 있는가?

서론에서부터 제임스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삶[정착한 삶]이 과연 국가 주변에서 수렵·채집하는 삶보다 더 나은 것인지를 질문한다. 그가 보기에, 미개인이라 규정된 바바리안들이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욱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았다. 물론 이때 제임스가 규정하는 국가 안에서의 삶이 근대적 국가에서의 삶과 같은 선상에서 얘기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질문 하나. 그가 말하는 국가란 무엇일까?) 다만, 인류에게 정착 생활이 ‘원래부터’ 유리한 경관 조성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정착 생활이 수렵·채집하는 삶보다 더 진보한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는 단지 특정한 조건 속에서 불을 사용하게 됐고 식량 생산을 하게 됐으며 정착하게 되었고 국가적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길들이는 삶과 길들여진 삶
“호모사피엔스가 정착생활, 과밀한 생활공간, 점점 더 곡물 위주로 변하는 식단에 적응하면서 경험한 [위의 가축 사례와] 유사한 형태학 및 행동상의 변화를 어느 정도까지 찾아보아야 그럴듯해 보일까? 조사의 경로는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조사가 매우 가치 있다고 믿는다. 도무스의 다른 모든 종들이 우리의 길들이기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듯, 우리 자신도 의도한 방식으로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나 스스로 도무스에 길든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20)

 

제임스는 인류가 단지 자신에게 불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에게 이로운 경관을 조성하게 됐다고 하는 낭만적 역사 서술에 반대한다. 인류는 그들이 생물을 길들인 만큼이나 길들여졌다! 길들인 주체와 길들여진 대상 사이에는 일방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은 가축을 길들임으로써 그들의 야생성을 거세한 만큼 스스로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여러 방식을 거세당했다.

이 구도는 그대로 장자적 문제의식과 접목시킬 수 있다. (cf. 〈천지〉 11장,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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