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9.25 니나노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09-29 12:32
조회
67
이번 주 니나노 세미나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사카구치 안고론⟫ 중 <타락에 관하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안고의 다른 작품 <부모가 버려지는 세상>을 3분의 2정도 번역했습니다.

 

저는 작년 겨울 즈음인가 안고의 <타락론>을 보면서 “타락할 때까지 타락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는 와중에 끌려서 지금까지 니나노 붙박이를 자처하는 중인데요,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글은 안고를 일거에 ‘시대의 대변인’으로 만들었던 만큼 거꾸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안고가 말하는 “타락”이 단순히 도덕에 상대 되는 의미의 타락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모색되는 ‘평범한 윤리성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안고에게는 타자 혹은 타자성의 문제는 매번 중요하게 다뤄지는데요, 타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윤리성이 출현한다는 말입니다.

타자와 만난다는 건, 단순히 타자와 섞여 살고 그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나가이 가후(1879~1959)라는 대작가에 대한 안고의 비판에서 그 점이 잘 나타납니다. 가후는 지식인으로서의 무력함을 토로하며 ‘게샤구샤’로 살기를 선언하고 게이샤들과 어울리며 그것을 소설로 써냈는데요, 세간에선 그의 이런 자세를 데카당스적이라고 하며 높이 평가 했습니다. 그러나 안고는 가후를 ‘통속작가’라고 혹평했습니다. 안고는 가후에 대해 “명예와 약간의 재물 가진” 자신의 위치와 자신이 내면에 안주하여 끝끝내 “관계나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립’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가후의 데카당스 따위는 그저 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한 가후는 “처음부터 타자를 만났던 적이 없”고 “‘타락’한 적도 없다”(<역사와 반복>가라타니 고진. 234쪽)는 것이지요. 가후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안고가 단순히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잘 안다는 것이 안고가 말하는 타락이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럼 안고가 말하는 타락이란 뭘까요. 가라타니는 안고의 타락을 자의식 혹은 특정한 위치의 자기를 ‘내던지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는데요. 이에 대해 저희는 거의 1시간 가까이 토론했습니다. 정리하면 ‘사람을 죽인다’는 모럴에 대해 ‘사람이란 뭔가’를 묻는 것이 비모랄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계속 어떤 경계를 세우고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으로 이분하지요. 가후처럼 ‘돈은 나쁜 거야’라고 하며 돈을 버리는 지점에서 멈춘다거나 기존의 정치나 가치에 대한 거부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타락입니다. 안고는 인간이란 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같은 사고에 성실하게 몸을 바쳐야’한다고요. 다른 말로 우리가 전제하는 것, 규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질문하고 경계를 흔드는 것이죠. 우리의 전제에 대해 질문하고 흔들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타자와의 관계성 속으로 내던’져야 하는 것이죠. 안고와 안고를 보는 가라타니를 통해 타락이 자신의 내면이나 어떤 위치에 포함된 자신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해체’하며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임을 조금 알게되었습니다.

가령 앞서 번역한 <역사가로서의 안고>에서도 안고는 일본의 역사관에 동조하지 않고 16세기 유럽 선교사들의 기록 자료를 번역하며 “일본사에 없던 인식을 얻었”습니다. 일본과 일본의 외부라는 ‘일반적 인식’이 아니라 근대 세계 시스탬에서 일본을 밖으로부터 안으로 본 것이지요. 이런 전환은 역사성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반적이고 익숙한 역사관의 밑바닥을 뚫고 나오는 속에서 새로운 역사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전쟁 전후 안고가 조선을 단지 착취의 대상인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럼 9월 25일 니나노 후기를 마치며, 가라타니의 <타락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사카구치 안고를 전후의 풍속으로부터 떨어 뜨려놓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역사성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소화」의 정신적 위기를 그 최심부에서 통과했고, 우리들은 대게 그 밑바닥에 서 있지 않는다. 오늘날 난세스나 어릿광대는 유행하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난센스 문학은 아직 난센스초자 되지 않는다」라는 안고의 말은 지금도 들어맞는다. 안고에게는 난센스가 타자의 체험에 다름 아닌 것에 주의해야 한다. 즉, 그에게 지성상의 문제가 윤리적 문제와 똑같고, 그 역도 참이다. 그러한 것을 모르는 난센스나 웃음은 결국 「세상의 겉껍질」에 그치게 될 수밖에 없다.

-중략-

안고의 「타락」은 틀림없이 그런 공동존재로부터 「추락하는」것이고, 역으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내던져지는」것을 함의한다. 그것이 안고에게 있어서는 한결같은 「인간」의 본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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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30 19:32
    왜 지영 샘이 안고에게 계속 끌리시는지를 알 것 같구만요.
    타자를 만난다는 문제란 곧 자기의 고향밖으로 내던져지는 경험입니다. 스스로를 고향으로부터 자꾸 내던지는 태도.
    자기가 믿고 있는 체계를 의심하는 데에서 안고의 '윤리'가 시작됩니다. 지영 샘의 안고론도 점점 더 깊어지시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