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11.20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9-11-15 20:03
조회
104
11월 20일 니나노 공지

<문학의 고향>을 끝내고 <육체 자체가 생각하다>를 시작했습니다 <문학의 고향> 말미에는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세모노가타리]의 한 대목입니다. 헤이안 시대의 이 이야기집은 ‘우타 모노가타리’라고 하여, 노래 한 구절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안고가 주목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昔、ある男が女に懸想けそうして頻しきりに口説いてみるのですが、女がうんと言いません。ようやく三年目に、それでは一緒になってもいいと女が言うようになったので、男は飛びたつばかりに喜び、さっそく、駈落かけおちすることになって二人は都を逃げだしたのです。芥の渡しという所をすぎて野原へかかった頃には夜も更ふけ、そのうえ雷が鳴り雨が降りだしました。男は女の手をひいて野原を一散に駈けだしたのですが、稲妻にてらされた草の葉の露をみて、女は手をひかれて走りながら、あれはなに? と尋ねました。然し、男はあせっていて、返事をするひまもありません。ようやく一軒の荒れ果てた家を見つけたので、飛びこんで、女を押入の中へ入れ、鬼が来たら一刺しにしてくれようと槍やりをもって押入れの前にがんばっていたのですが、それにも拘かかわらず鬼が来て、押入の中の女を食べてしまったのです。生憎あいにくそのとき、荒々しい雷が鳴りひびいたので、女の悲鳴もきこえなかったのでした。夜が明けて、男は始めて女がすでに鬼に殺されてしまったことに気付いたのです。そこで、ぬばたまのなにかと人の問いしとき露と答えてけなましものを――つまり、草の葉の露を見てあれはなにと女がきいたとき、露だと答えて、一緒に消えてしまえばよかった――という歌をよんで、泣いたという話です。
옛날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연모하여 계속 구애했으나 여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3년째가 되어 ‘그렇다면 함께 살아도 좋아’라고 여자가 말하자 남자는 날아오를듯 기뻐하였고, 둘은 즉시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아쿠타노와나시라고 하는 곳을 지나 들판에 가닿았을 무렵에는 밤도 깊어지고 게다가 천둥이 치며 비가 내렸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끌며 언덕을 쏜살같이 뛰기 시작하는데, 번개로 밝아진 풀 잎사귀의 이슬을 보자 이끌려 다리던 여자가 ‘저건 뭐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서두르고 있었기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한 채의 다 쓰러져가는 집을 발견한자 뛰어들어 여자를 벽장 안에 집어넣고 도깨비가 온다면 한방 먹여주려고 창을 잡은 채 벽장 앞에 버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깨비가 와서 벽장 속 여자를 잡아먹어버린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세차게 천둥이 쳤기에 여자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밤이 밝자 남자는 비로소 여자가 도깨비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거기서 “풀잎의 열매 / 저것은 무엇인가 / 물어봤을 때 / 이슬이라 답하고 / 사라져버릴 것을” -풀이하자면, 풀잎의 이슬을 보고 저게 무엇이냐 여자가 물었을 때 이슬이라 대답하고 함께 사라지면 좋았을텐데- 하고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간에 삽입된 노래는 글자 수를 5.7.5.7.7로 맞추는 와카입니다. 이 노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죠. 안고는 이 이야기에 대해 “여자를 생각하는 정열이 격하면 격할수록 여자가 도깨비에게 먹히는 참혹함이 살아있다”고 평합니다. 여자가 ‘저건 무엇이냐’라고 묻는 사소함을 지나쳐버리는 남자의 맹목이 이 이야기를 더욱 비극으로 만들지요. 그렇게나 구원을 추구하며 달려가지만, 그 끝에 ‘내처지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 문학의 고향이라고 안고는 말합니다. 단지 ‘모럴이 없는’ 이야기만 양산하는 것은 문학일 수 없다고 안고는 계속 말하지요.
 それならば、生存の孤独とか、我々のふるさとというものは、このようにむごたらしく、救いのないものでありましょうか。私は、いかにも、そのように、むごたらしく、救いのないものだと思います。この暗黒の孤独には、どうしても救いがない。我々の現身うつしみは、道に迷えば、救いの家を予期して歩くことができる。けれども、この孤独は、いつも曠野を迷うだけで、救いの家を予期すらもできない。そうして、最後に、むごたらしいこと、救いがないということ、それだけが、唯一ゆいいつの救いなのであります。モラルがないということ自体がモラルであると同じように、救いがないということ自体が救いであります。
그렇다면 생존의 고독이나 우리의 고향이란 이처럼 참혹하고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일까요? 저는 아무래도 그처럼 참혹하고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암흑의 고독에는 아무리 봐도 구원이 없습니다. 현실을 사는 우리의 몸은 길을 헤매면 구원의 집을 기대하고 예상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독은 언제나 광야를 헤맬 뿐, 구원의 집을 예기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최후에는 참혹한 것, 구원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입니다. 모럴이 없다는 것 자체가 모럴인 것처럼 구원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구원인 것입니다.

삶에는 실제적 차원이라는 것이 있고, 모럴은 그 현실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어 갑니다. 어떻게 보면 모럴은 사후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데 절대적인 방향을 지시해주는 모럴이란 없을 겁니다. 이야기는 모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럴이 부딪고 망가지는 것을 보여주지요. 안고는 문학은 삶 자체를 주목하고 인식하는 차원에서만 쓰여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행위해도 구원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만이 문학을 할 수 있고, 또 그런 자에게만 구원과 모럴이 있을 수 있다고 말이죠.
다음 시간은 니나노 일본어 4시즌 마지막 시간입니다. 과제는 따로 없습니다.
최대한 마무리할 수 있는 데까지 마무리 해 봅시다~
전체 1

  • 2019-11-15 21:35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전부가 하나의 상상일 수 있음을 아는 자에게. 그렇기 때문에 초월로 도피하거나 허무하게 주저 앉아 있지 않은 것.
    눈 앞의 아이와, 눈 앞의 노인, 나의 타자들을 끝까지 보면서 가는 것.
    정말 어려운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어의 숲을 안고님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