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1. 19 <문> 수경조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6-11-22 20:45
조회
259
<산시로>를 시작으로 <그 후>를 지나 드디어 <문>을 읽었습니다. 남은 것은 <춘분 지나고까지> ~ <명암>까지 다섯 작품이 남았네요. 아직까지 소세키를 저와 어떻게 접속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벌써 끝이 보입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그 후>가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불륜이 시작하려는 지점에서 끝났다면, <문>에서는 소스케와 오요네의 불륜생활이 이미 6년이 지난 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후>가 <산시로>의 이후를 그린다고 했지만 딱히 눈에 띌 만큼 연결이 되지 않은 것처럼, <문> 역시 <그 후>와 눈에 띄게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근데 왜 <산시로>, <그 후>, <문>을 합쳐서 전기 삼부작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아리송합니다.

<문>에 대한 토론에 앞서서, 먼저 소스케가 얼마나 답답한 인물인지를 얘기했습니다. 혜원누나의 표현을 빌리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한(?) 느낌이라는데, 그만큼 속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뜻이겠죠. 특히 아버지의 유산문제는 작품 시작부터 언급됐는데, 소스케는 그것을 후반부까지 계속 질질 끌고 갑니다. 그렇다고 후반부에서 유산문제가 좋게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숙모가 와서, ‘그 재산은 없고, 너한테도 줄 것은 없지만 니(소스케)가 고로쿠를 잘 챙겨주라’는 말만 하고 돌아갑니다. 일을 해결할 의지가 없는 형을 보는 고로쿠는 너무 답답해했는데, 작품을 보는 우리들도 가슴이 많이 답답했습니다. (소세키 세미나를 하면서 모두의 얼굴이 이렇게 생동감있게 일그러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혜원누나는 이런 답답한 모습이 단지 유산문제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전반적인 태도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치과에서 치료하는 장면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의사는 소스케의 잇몸이 괴저, 썩어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스케는 딱히 이 상태를 치료하지 않고 마취라는 임시방편으로 견뎌냅니다. 야스이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야스이라는 이름을 듣고 소스케가 취한 것은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일단 현실을 외면하는 것,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흘정도 좌선하러 가마쿠라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잠만 자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열지 못하는 소스케에 대한 구절이 있는데, 어쩌면 소스케에게는 처음부터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작품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툇마루에서의 대화입니다. 이때 두 장면의 소스케는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다시 겨울이 올 것이라는 소스케의 대사에서 첫 장면의 소스케와는 달리 여러 시도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느낀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들이야말로 소스케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유산문제나 야스이에 부딪힌 소스케는 얼핏 일상생활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취함으로써 자신의 괴저를 견뎌내는 것처럼, 불안해보이는 문제들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소스케가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소스케는 이토나 숙부의 죽음과 같이 사회적 혹은 혈연관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덤덤합니다. 반면에 야스이라는 이름을 듣고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데, 야스이사건 역시 견뎌내는 것으로 보아 사실 그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도 소스케의 일상에 변화를 줄만큼 큰 충격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합니다.

작품은 수시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듭니다. 빈번한 시간축의 변화는 소스케와 오요네가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인물들의 대사가 아니라 화자의 시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물들은 의식적으로 과거에 대한 얘기를 꺼립니다. 간혹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스스로 속죄를 할 때입니다. 가령 소스케는 오요네가 미래를 밝게, 희망이 있는 것처럼 얘기할 때, ‘우리들은 그런 좋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하면서 절벽 밑의 생활, 화려하고 사교적이었던 그의 과거와는 정반대의 생활을 일부러 자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요네는 소스케의 표정이 좋지 않을 때마다 자신이 아이를 가지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 소스케는 야스이에게, 오요네는 소스케에게 일종의 채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소스케와 오요네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들은 6년 동안 같이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다른 부부들이 생활하는 모습과 확연히 다릅니다. 6년의 시간 동안 말다툼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은 것 같지만 동시에 에로틱한 분위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관계들은 소극적이고 가볍게 보는 만큼 서로에 대해서는 돈독한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자신들의 중요한 문제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메이지시대에 이르러서야 연애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혼인은 더 이상 가문의 만남이 아니라 개인의 만남으로 성사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부부 역시 가문이 아니라 개인 사이의 연애인데, 그러면서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남녀 사이의 갈등, 에로한 분위기는 오요네와 고로쿠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둘 사이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거나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어색했던 사이가 점점 나아지고 오요네의 뒷모습을 보는 고로쿠의 모습에서 소스케보다는 좀 더 끈적끈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이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기서도 소스케, 오요네, 고로쿠로 이루어지는 삼각관계가 있다는 얘기만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만한 이곳저곳>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것은 소세키가 만주와 조선을 유람한 내용으로 소설이 아닌 기행문이라는 점에서 소세키의 생각을 좀 더 여과 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소세키가 다른 동양인을 매우 차별하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외국인이 자신을 일본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생각할 때 매우 불쾌했다고 하거나 아니면 만주 노동자들을 쿨리라고 하면서 비하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너무 잘 나타나서 재원누나는 소세키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깊은 화가 속에서 끓어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세키는 반전을 외쳤는데 이런 차별적인 시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반제국이나 반식민을 비판할 때, 그것이 어떤 것을 기반으로 하는지를 봐야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즉, 소세키에게 국가가 어떤 것인지, 그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소세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반전의 사상가에 꼭 들어맞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사실 재원누나와 수경쌤을 제외한 나머지가 불성실한 관계로 별로 얘기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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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24 10:40
    <만한 이곳저곳>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어요. 연재 형식이다 보니 아주 깊이 있는 성찰까지야 없다 해도, 그렇기 때문에 스윽 드러나 버리는 어떤 점들이 재미있지요. 하지만, 소세키에게서 제국주의적 시선이 보인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재미없는데, 왜냐면... 그걸 누가 모르냐고요~ 혹은 아니라고 하냐고요~ 제국주의 시선이 있다, 는 그 진단만으로 뭘 얻을 수 있을까요ㅎ 글이란 건 쓴 사람이 어떤 데에 민감하고 어떤 데에 덜 민감한지, 어떤 것에 한참 시선을 두고 어떤 것을 스쳐지나가는지 보여줘서 재미나요. 소세키의 지각은 쿨리를 '스쳐지나'가면서 여과 없이 '쿨리'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전장 여기저기서는 일본과 적국의 싸움이 아니라 존재가 죽어버리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요. 그리고 뤼순에서 체류한 호텔에서는 폐허 속에 홀로 아름답게 존재하는 이곳이 이상하고 모순적인 곳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소세키가 국가주의자나 제국주의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국가와 제국주의와 근대 등등의 담론이 철철 넘쳐 흐르는 시공간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문득문득 그것에서 이상한 기미를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 흥미로워요. 어딘가에 푹 젖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문득문득 이상한 걸 느끼는 사람, 그렇기에 글을 쓰고, 혹은 글을 쓰면서 더더 그렇게 되는 사람. 소세키 소설의 주인공들도 그렇지 않던가요.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시공간에 서 있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