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4주차 후기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11-04 12:52
조회
103
이제 푸코강의가 무르익어 4주차 강의에서는 규율권력에 대해 배웁니다. 감시와 처벌이 행해지는 감옥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사회전반적인 규율이 확산되는 것을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를 비롯해 학교 공장 병원 등 사회에서 비슷하게 작용하는 규율권력이 어떻게 신체에 작용하여 새롭게 진화적 인간을 만들어 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억압하는 권력주체란 없다

계몽주의 시대 혹은 푸코의 고전주의 시대에는 주체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홉스는 ‘사회계약론’에서 리바이어던 모델을 통해 사회는 자연상태의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주체들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여 국가라는 안전한 곳을 만들기로 약속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17~18세기 프랑스) 형법개혁론자들도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들이 사는 사회에서 위법자는 사회의 계약을 파괴하고 사회전체의 불이익을 가져온 자이므로 처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권리가 계약이나 교환이 가능하다는 경제적 관념을 기반으로 법적 주체이며 계약적 주체를 상정합니다. 허나 우리가 푸코의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권력의 중심부나 권력 주체를 버려야 합니다. 형법개혁론자들도 의식적으로 군주권이나 하층권력을 의식하고 법을 개혁하는 주체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힘이 먼저 존재했고 이 힘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입니다. 푸코는 이런 권력의 효과적 측면의 계열화를 도출하여 보여줍니다. 결국 자연스런 욕망이 먼저고 나중에 의도가 만들어집니다.

 

들뢰즈-가타리도 개인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욕망과 무의식을 이야기합니다. 개인들의 욕망이 모여 사회적 욕망이 되는 것도 사회적 욕망에 개인의 욕망이 종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과 사회는 이분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은 사회의 부분으로써가 아니라 전체를 생산하는 부분으로 작동합니다. 부분의 생산과 더불어 전체가 같이 생산됩니다. 이는 작동의 역동성을 보여주며 배치를 보여줍니다. 개인은 사회 배치를 생성하며 존재하므로 개인의 욕망을 보려면 욕망이 생성되는 사회 역사적 토대도 동시에 봐야합니다. 푸코가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점이 이곳입니다.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의 개념은 이 ‘욕망’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권력은 누군가가 휘두르는 억압이나 구속이 아닙니다. 권력은 관계에서 생성되고 그 안에서 주체가 생성됩니다.

 

주체화엔 양면이 있다 자율적 주체이면서 예속적 주체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 일람표나 시간표에 따라 인체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행동의 제약과 구속을 받습니다. 신체는 신체와 연결되는 대상과 연결되고 다른 신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규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렇게 규율은 개인을 제조합니다. 권력이 생산한다고 했을 때 공장에서 여러 요소를 이런 저런 기술로 제조하듯 사회 곳곳의 규율(권력)은 근대적 개인을 제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주체라면 억압이나 규율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자유로워야 할 것 같지만 주체는 언제나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 억압이나 강제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점이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원하지 않으며 자율적으로 복종을 원합니다. 어떻게 우린 자신의 해방을 바라듯이 예속을 욕망할까요? 푸코가 싸운 부분이 이런 부분입니다. 주권을 가진 주체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사회계약론적 주권 개념과 국가중심의 억압적 권력이란 없다는 점입니다. 푸코 당시 만연했던 고전 막시즘을 지지하는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억압받는 노동자를 지식인이 일깨운다는 계몽적 해방론을 그는 부정합니다. 만약 지식인이 노동자를 해방해서 혁명을 이룬다면 그 다음날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계속되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운동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질까요? 아마 그 사회에서는 새로운 위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로 설명합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과 옷으로 구분되던 사회가 탈코드화하여 근대의 자유 평등 박애로 기존의 위계가 사라지더라도 새롭게 사회의 규율에 복종하며 다른 위계가 형성되며 재코드화됩니다. 근대주체의 역설은 자율적으로 종속을 원한다는 겁니다. 주체는 자율적이면서 복종적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지만 그가 놓인 타율적 조건에서 만들어집니다. 주체는 스스로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길 바라면서 정상성의 범주 안으로 진입하기를 희망하는 자율적 존재이면서도 역량이 강화될수록 더욱 복종하는 신체가 됩니다. 사회는 이런 권력관계에 길들여진 개인의 역량이 강화되는 힘을 증대시키고 정치적으로 힘이 약화되는 복종하는 신체를 만듭니다. 왜 신체역량의 강화는 복종으로 이러질 수 있는지는 개인을 생성하는 기술에 있습니다. 학교 공장 군대 병원 등 그 시기 사회 곳곳에서는 효율성이 지배하는 기술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경제적 효율성의 증대를 통해 개인의 성장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 진보와 이를 통해 사회적 진화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이 때 시간도 분할가능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보한다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진보의 개념에서 개인의 능동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개인 안에서 주체는 스스로 예속적인 주체가 되기를 희망하게 됩니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는 ‘가시성’이라고 지난 시간에 배웁니다. 바둑판처럼 배열된 곳에 무언가를 배치하여 드러내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동일성 안에 차이를 배치합니다. 그렇기에 당시 병도 드러내어 발견할 수 있다는 해부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의식이나 행동을 이끄는 힘은 사회에서 만들어집니다. 예속이 사회의 모든 곳에서 효용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곳에서 규율권력은 다른 신체를 생산합니다. 이를 ‘정치해부학’ 또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체를 작은 단위로 분리하고 배치하며 개인마다 작용하게 하는 권력의 기술이 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개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율은 신체와 힘을 분리시킵니다. 시간표의 새로운 테그닉을 통한 신체와 객체의 유기적 연결로 신체에 대한 구체적 체계화가 이루어집니다. 신체의 변화는 객체(대상이 되는 도구)의 발전도 가져옵니다. 이렇게 규율권력은 공개적이며 은밀히 작동합니다. 모든 걸 관리대상으로 두는 가시적 권력이면서도 과거 화려한 군주권의 과시적 성격과 달리 개인마다 직접 작용하는 은밀한 권력인 것이죠. 그리고 이런 계산된 권력은 끊임없이 작동하며 주체 스스로 예속을 바라는 존재로 재생산합니다.

 

권력에 저항하라

그렇다면 끊임없이 작동하는 규율권력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자율적인 듯 복종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역사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겠지요. 이미 살펴보았듯이 주체는 자율적이며 복종적입니다. 외부에 권력의 중심을 상정하고 타도를 외치지 않고 권력의 작동관계를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규율 권력이란 일련의 새로운 기술들에 길들여져 복종을 원하지만 반면 이를 구부릴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권력항은 생산될 수 있습니다. 권력관계에 따라 항은 생산됩니다. 그렇다면 권력관계를 기존과 다른 관계로 만들 수 있다면 권력항도 새롭게 형성됩니다. 작동하는 권력을 다르게 구부릴 수 있는 지점을 우리는 생각해야지요. 이것이 권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우린 권력관계에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이런 권력관계에서 안 만들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기술을 발명해야하는 숙제가 푸코가 우리 각자에게 던진 질문일 것입니다. 여기에선 어떤 무력감도 없습니다. 규율권력의 힘이 세니 우리가 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는 통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스승 깡기엠은 생명의 본질은 anormal(비정상)이 아니라 anomal(변칙적)하다고 말합니다. 정상 비정상의 규준을 떠나 정상으로 복속하려하기보다 자신만의 변칙을 생성하려는 게 생명의 본질이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푸코가 후기 권력 대신 사용하는 ‘통치성’이라는 말에서 강조하는 ‘사목권력’도 양떼가 목자를 따라 가는 것이 스스로에게 이득이어서 따라가지만 어떤 양은 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좋은 초지와 물이 아니어도 이익이 되는 것을 떠난 관계를 원한다면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는 되어가는 존재(becoming)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후기 푸코가 강조한 자기 윤리의 개발이겠지요. 끊임없는 자기변용!! 이런 생각이 앞으로 이어질 수업에서도 주요한 생각꺼리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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