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4주차 후기

작성자
혜가
작성일
2017-11-04 17:35
조회
84
 

어리버리하면서 따라가다 보니 벌써 감시와 처벌의 절반이 넘어가네요.  4주차 강의는 예속적 주체가 어떻게 우리의 신체를 생산해내는지 또 새로운 규율 기술이 어떻게 자율적 복종으로 스스로를 구속시키는지, 푸코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규율권력의 메커니즘

권력은 분배하고 관리하는 중앙처리 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권력의 중심부에 권력의 주체가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근대 정치철학에서 주체는 자율적 주체이지만 푸코는 근대 철학의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예속적 주체라고 한다. 주체란 억압적 상황을 내가 돌파해나가는 자율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내 권력을 내가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가 양도할 수도 있다는 사회적 계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자발적 주체의 의지를 전제로 하는 것 자체가 계약관계에서 권리를 양도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 시대에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개개인들을 구성요소로 갖는 사회의 모델이 계약과 교환이라는 추상적인 법률 형식에 의거해 있다고 말한다. 상업적인 사회란 개별적인 법적 주체의 계약에 의한 결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는 사회의 계약에 의해 자율적 주체로 개인을 사회 구성원안에서 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계약의 파기는 위법행위로 간주했다. 이는 곧 사회전체에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 상업적인 사회는(자본주의) 개별적 법적 주체로서 개인의 권력과 지식의 결합된 새로운 기술에 의해 규율을 만들어낸다. 이 기술은 권력의 특유한 기술로 개인을 제조하고 생산해내도록 미세하게 세분화된 기술이다. 그러므로 푸코는 근대인은 예속적 주체화로 제조되었다고 말한다. 고전 맑시즘은 규율을 ‘배제한다, 처벌한다, 억누른다,’ 등등으로 부정적인 표현으로 권력의 효과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사회 계약론에 의해 이탈한 개인을 제약하고 억누르는 규율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어 무엇을 못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상업사회에서의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뭘 생산하느냐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어떤 대상이 객관이라고 부르는 영역도 생산한다. 이와 더불어 진실이나 진리라는 것도 생산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개인을 제조해내는 새로운 기술을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라 한다.

푸코는 18세기를 인간의 인권의 확정되고 자율권이 확장되고 인간의 봉건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회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푸코가 사회가 더 나빠졌다고 말하는 것도 곤란하다. 푸코는 역사를 볼 때 뭐가 좋아지고 뭐가 나빠지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시공간마다 개인을 형성해내고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생산하고, 힘의 관계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하는 특정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율적 주체와 예속적 주체

푸코의 질문은 사회계약론에 의해 근대적인 정치철학에 기본적 전제가 되는 자율적 주체는 또 다른 것을 전제 한다. 인간이 억압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있다면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떨치고 일어서려는 해방의 의지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해방을 원한다. 누구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근대 정치철학에서는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전제들이다. 푸코는 이것을 맑시즘이 돌파하지 못한 현실적인 지점으로 지적한다.

푸코의 질문은 우리가 자율적 주체인가? 자율적으로 일터로 나가고 자율적으로 공부하고 결혼하고 애도 낳는다. 이러한 것들이 다 자율적 주체이다. 그렇지만 푸코는 이러한 주체가 어떻게 타율적 주체로 만들어졌는가? 어떻게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복종하도록 하는지? 자율적 복종을 이해하는 것은 ‘자율적 주체’ 속에 들어있는 주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거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주체라는 것이 푸코는 그 속에 예속적 주체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어떻게 자율적 주체가 복종하는 주체로 이동하는지를 규율 권력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

고전 맑시즘은 국가와 사회가 우릴 억압하니까 해방만을 원한다는 대립적인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들/카타리는 우리는 해방만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도 동시에 욕망한다. 라고 말한다. 푸코도 우리가 정말 해방과 자유만 욕망하는가? 규율 기술은 개체를 개별적 위계화와 차별화를 통하여 새로운 위계화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근대적 인권은 자율,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법제화된 인권인식을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푸코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규율 기술의 발달하는 이면에서 동시에 근대적 인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근대적 인권이 출현하는 것처럼 이미지화 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규율 기술의 발달로 더욱 위계화와 차별화가 내면화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이 개인을 일반화하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 개인을 차별화 시키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법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형식적 주체를 만들어 놓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주체라는 것이다. 푸코가 관심을 갖는 것은 권력이 어떻게 실직적인 주체를 생산하는가이다. 실질적인 주체란 오늘도 학교를 가야하고, 줄맞추어서 서야 하고 이러한 것들이 규율권력에 이바지하는 신체이다. 군대를 가야하고, 노동을 해야 하고, 등등이 실질적인 주체를 생산해내는 메커니즘이다

푸코는 규율의 이중성을 말한다. 신체가 자율적인데 동시에 예속적이다. 자율적 주체에서 어떻게 정상적인 척도에서 안 벗어나려는 복종적인 주체가 되었는가? 결론적으로 푸코가 규율 권력을 통해서 분석한 것은 규율이란 강제하고 억압하고 제안하고 금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규율 기술은 ‘규율권력을 통해서 스스로가 더 능력 있는 신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뭔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신체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신체는 더 복종적인 신체와 예속적 주체로 변해가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따라서 신체 역량이 증대 할수록 더 자발적 예속 상태에 머물러있게 된다. 스피노자의 신체의 수동성이란 개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푸코는 근대 정치철학은 사회주의 계약론에서나, 고전 맑시즘의 억압과 해방이라는 전제들과 다른 방식의 권력론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우리는 억압을 느끼면 반드시 해방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푸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억압하면 해방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구속해 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푸코가 분석하는 것은 법 조항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복종하는 신체가 어떻게 실제적인 권력의 개체를 생산해 내는지 그리고 그 기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푸코가 분석하는 것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작동하는 법률 조항이나 권력의 집행여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규율권력의 기술들이 역사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생산해내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기술들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이 우리의 신체에 어떠한 기술을 접목시켜 우리를 예속적 주체화로 만들어 낼 것인지를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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