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11월 8일 절차탁마Q 4학기 5차시-수업 후기

작성자
이미영
작성일
2017-11-11 16:04
조회
107
11월 8일 절차탁마Q 4학기 5차시-수업후기

제레미 벤덤은 동생이 관장하던 공장의 운영 방법을 보고 판옵티콘을 구상하였다. 그가 보기에 그곳은 가장 효과적인 감시체계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 구조는 그가 관심을 가졌던 감옥의 개혁에 적용되었다. 판옵티콘에서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은 중앙은 모든 것을 볼 수만 있고, 그 주변은 절대적인 가시성의 영역으로 만들어져 시선이 비대칭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수감자들이 스스로 규율을 내면화하여 예속적 주체로 제조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SNS가 현대의 판옵티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SNS는 감시를 하는 중앙이 뚜렷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과 종종 역으로 감시체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시선의 비대칭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스템은 규율권력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권력관계가 다르고 그 효과가 다르다.

왜 규율권력을 설명하다가 감옥으로 끝냈을까? 푸코가 감옥에 관심이 있어서라거나, 권력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한 사례로써 감옥에 대해 쓴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연구했다면 관념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을 촉발시키는 현실이다. 푸코가 고민했던 것은 배제의 논리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특정한 상황에 어떤 것이 배제된 공간속에서 담론을 형성한다. 권력관계에서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미 참과 거짓을 가르는 규준이 있다는 것이며 배제와 분할을 가르는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푸코는 삶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소수의 목소리를 들은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지식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와 삶의 조건 속에서 참을 수 없음을 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꼭 현장에 가서 같이 투쟁하거나 개념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은 이론자체로 실천이며 공부하는 자체가 실천이다. 현실 속에서 투쟁하는 자들의 일상이 그렇듯이 공부하는 자들은 공부를 투쟁하듯이 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을 살면서 참을 수 없음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고 내 목소리 자체가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푸코는 감옥의 열악한 환경의 비판에서 감옥 자체에 대한 거부로 진행되는 감옥폭동의 현장을 경험하며 그곳의 생생한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현실과 사회계약론, 사법적 권력에 대한 의구심 등 일련의 사건과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있었던 문제의식이 촉발되어 감옥에 대해 썼다. 우리는 그의 연구자체가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푸코가 감옥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권력의 중심부가 따로 있고 그것에 대해 주체적으로 저항한다거나, 누구나 억압을 당하면 거기에 맞서려고 의지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런 권력과 저항의 대립에 대한 주권적 권력관계의 개념을 해체한다. 그는 권력이 주체로 환원 가능할 수 없으며, 자유와 저항을 대립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관계가 이미 존재에 내재되어 있다고 봤다. 그것은 우리의 활동 속에, 욕망 속에 작동하는 그 무엇이다. 그는 지식과 현실적인 조건들의 문제의식 속에서 저항과 힘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조건 속에서 우리는 앎과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가? 핵심은 권력관계이다.

권력관계를 지배관계로 규정하지 않으며 권력관계의 문제들을 봐야한다. 권력을 지배관계로 보면 저항을 놓치게 된다. 푸코는 권력을 전략적인 게임으로 봤다. 게임 안에 물론 힘들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언어가 어떤 장 안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언어가 사용되는 장의 권력게임을 분석하는 것이다. 언어는 매번 연기되고 있는 장에 따라 다르게 플레이된다. 이런 의미로 권력관계를 봐라. 권력관계는 계속 플레이되는 게임이다. 권력을 게임으로 보자는 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따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힘에 종속되어서 그 논리대로 돌아가는 것은 없다. 권력게임은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사회의 장에서 그 힘들과 어떤 식으로 작용을 주고받으며 저항의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전략과 전술, 기술의 변화가 있으며 우연성의 개입으로 게임의 판이 바뀌기도 한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수이며 이것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목적도 그대로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국면마다 새로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개체를 관통하고 있는 힘의 관계를 분석하고 사건들을 개념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푸코는 규율권력이 있다고 전제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과 자료를 찾아보며 어떠한 도식을 도출해내고 힘 관계의 논리 및 그 효과가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 시대와 시대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존재하며 각 시대마다 다르게 권력관계가 작동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신체형일 때는 왕의 권력만이 가시적이었다. 그런데 근대권력은 왕을 가시화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사람들이 가시화되지만 누가 지배하는지 모른다. 근대 규율권력의 핵심은 신체가 일련의 기계적이고 세분화된 관리 속에서 훨씬 더 유용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용성이 증대될수록 복종적으로 되는가? 이것이 주체화의 문제이다. 규율은 신체와 힘을 분리시킨다.

우리는 어느 순간 내면화된 자기 나름의 품행이 있다. 그것은 관습과 법적인 것, 지식의 한도 내에서 정해진다. 푸코는 이것을 통치성 개념으로 설명한다. 권력은 우리를 특정한 행위 양식으로 인도한다. 우리 일상의 미세한 권력관계에 이미 사회적으로 작동되는 온갖 규준들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권력관계를 내재한 채로 존재하며 이를 통해 지배관계가 재생산된다. 우리는 도처에서 권력관계를 작동시키고 동시에 받는다. 일방적인 억압 상태로만 존재는 것은 없다. 억압 받는 것 그 자체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어도 억압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다. 권력을 지배관계로만 보면 억압받는 자를 수동적으로만 보고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만 생각한다.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소극적, 반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힘의 고양으로 이끌지 못하며 상대를 지치게 만든다. 그러니 수동적인 것은 받기만 하고 능동적인 것은 작용하기만 한다고 보면 안 된다. 모든 관계의 상호성을 봐야하다. 동시에 주고받는 것이다. 개인적 무의식과 사회적 무의식은 동시적으로 서로에게 투여된다. 이것을 알면 저항의 문제를 다르게 사고할 수 있다. 저항하는 힘이 통치성안에 내재되어 있다. 억압에 대해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저항이 아니다. 타인이 날 규정하는 관계 속에서 동시에 나도 타인을 규정하려고 한다. 규율권력의 저항은 지배 상태의 그것과 다르게 작동해야 한다. 즉 아무 것도 안하거나 무조건의 반대가 아니라 나의 힘을 전유하려는 권력을 다른 방식으로 인도하는 것, 타인에게 자기 삶의 양식을 설득시키는 것이 저항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보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자신이 부딪히고 있는 일상의 문제에 집중하자. 일상적인 것이 본질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떠나서 관념적인 지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권력관계가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타자를 자신의 힘으로 전유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예속이란 거기에 일방적으로 제한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예속되지 않고 능동적인 행위양식을 발명해내는 만큼 자유롭게 된다. 학교, 회사 등 이미 제도화된 곳에서는 다른 삶의 양식을 발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제도 밖의 양식과 같이 가며 품행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해야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권력관계에 의존하고 있는지 살펴봐야한다. 그 후 이것을 깰 수 있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만들고 실험하는 방법밖에 없다. 즉 모든 관계 속에서 배우고 우정으로 함께 살아가며 삶의 양식을 발명해야한다. 다른 삶의 가치와 행위가 같이 간다. 우리는 어떻게 권력 게임에 잘 참여할 것인가, 우연성 속에서 전략과 전술을 개발해서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사유해야한다. 그러면 타인의 행위양식 규정에 예속되지 않고 우리 삶의 양식을 고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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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12 23:13
    오오 정리왕 미영샘! ㅎㅎ 어떻게 권력 게임에 ‘잘’ 참여할 것인가, 어떻게 삶의 양식을 발명할 것인가! 푸코가 제기하게 해주는 능동적 질문인 것 같네요

  • 2017-11-13 21:30
    권력관계를 계속 곱씹게 되네요. 권력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는 없고, 복종과 저항의 문제도 외부적 강압을 문제 삼지 않고 기타 등등. 가장 국지적인 문제와 사회적 이슈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이 능동적인 철학! 갑자기 이런 느낌이 들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