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도덕의 계보 네번째 시간(04.09)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06 14:45
조회
115
“현존해 있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진 어떤 것은 그보다 우세한 힘에 의해 새로운 견해로 언제나 다시 해석되며 새롭게 독점되어 새로운 효용성으로 바뀌고 전환된다. 유기체적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생기Geschen 는 하나의 제압이자 지배이며, 그리고 다시금 모든 제압과 지배는 지금까지의 ‘의미’와 ‘목적’이 필연적으로 불명료해지거나 완전히 지워져야만 하는 새로운 해석이자 정돈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21쪽)

이번 주에 읽은 중 2논문 11절은, 제겐 ‘계보학’에 관한 짧은 강의처럼 느껴졌습니다. 니체에게 역사란 ‘해석의 투쟁’입니다. 니체의 관점에서 대상, 형식, 의미 같은 것들은 ‘지배’하고 ‘제압’하려는 힘들이 부단히 서로를 전유하고 밀어내고 변형시키는 과정의 결과물입니다. 존재를 작용에 앞세우지 않는 니체적 세계관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면, 대상과 형식은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앞서 존재하지 않으며 목적, 의미, 효용성은 그러한 힘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효과 정도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출현시키는 해석의 투쟁만이 있는 것이죠.

이런 관점을 역사에 적용시켜보면, 우리는 역사란 무수한 단절과 불연속을 내포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형벌’이라는 것이 그 목적과 의미를 내장한 채로 미리 주어져 있어서,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그 형식을 바꿔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형벌의 역사를 연속적이고 일직선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해석의 투쟁’에서 가장 마지막에 형성되는 ‘의미’와 ‘목적’을 자명한 것으로 믿고, 지금 우리의 자명함을 과거에 투사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납작하게 축소시켜버리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팩트’에 들어맞지 않는 말을 할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한 것으로 믿고 있는 가치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계보학이란 무엇일까요? 계보학은 거시적이고 연속적인 역사를 쓰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도덕 일반’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니체는 가치의 자명성을 넘어가기 위해서 역사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의 자명성에 의해 은폐되는 단절과 불연속을 가시화하기 위해 가치의 ‘기원’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니체는 가치의 기원으로, 그 ‘발생의 조건’으로 돌아감으로써 가치에 내재한 힘의지에 대한 낯선 가치평가를, 그것을 보는 반시대적 관점을 구성합니다. (영국의 도덕 계보학자들 또한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가치가 발생한 조건과 불연속적 사건으로서의 기원이 아니라, 현재의 가치를 절대화한 결과로 도출된 전도된 기원일 뿐입니다.)

“이 불행한 인간은 그들을 사유, 추리, 계산, 인과의 결합으로 축소되었고, ‘의식’으로, 즉 그들의 가장 빈약하고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관으로 축소되었다! (…)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431쪽)

이번 주,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의식’과 ‘영혼’에 대한 니체의 관점이었습니다. 니체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혹시 인간의 역사란 인간의 축소의 역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미래’와 ‘발전’을 동일시하는 데 익숙한 우리는, 보통 인간의 역사를 본능과 야만으로부터 이성과 문명으로의 발전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니체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영혼’, ‘자아’, ‘내면’,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신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본능 속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어오던 인간이 ‘의식’이라는 빈약한 기관으로 축소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물론, 니체가 단순하게 우리가 ‘발전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온 것을 뒤집어서 그것이 사실은 ‘타락의 역사’라거나 ‘퇴화의 역사’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니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영혼’, ‘자아’, ‘내면’과 같이 우리가 우리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특정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다룬 2논문을 끝까지 읽고 다음주에 함께 이야기해봐도 좋을 것 같네요.

다음주에는 《도덕의 계보》를 476페이지까지 읽고 만납니다. 간식은 선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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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9 19:39
    단순한 팩트체크 역시 우리의 상식을 견고히 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되는 것이군요 @_@ 계보학은 그것과 다른, 오히려 자명성을 넘어가는 역사의 '사용'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