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도덕의 계보 다섯 번째 시간 (4.16)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13 21:24
조회
145
“‘고통’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바로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말도록 하자 : 바로 이 경우에도 그 말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충분히 생각해 뽑아낼 만한 것이 남아 있다. 무엇인가 웃어야만 할 것조차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성욕을 사실상 개인적인 적(敵)으로 취급했던(그 도구인 여성, 이러한 ‘악마의 도구’를 포함하여) 쇼펜하우어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적이 필요했다는 것, 노기를 띤 담즙의 검푸른 언어를 좋아했다는 것, 격정에 넘쳐 화를 내기 위해 화를 냈다는 것, 자신의 적이 없었더라면, 헤겔이 없었더라면, 여성이나 관능이나 생존하고 거주하고자 하는 완전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는 병이 들었을 것이고, 염세주의자가 되어버렸을 것이라는 사실을(―왜냐하면 아무리 그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해도, 그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시하지 말도록 하자.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었더라면 쇼펜하우어는 살아 있지 않았을 것이며, 인생에 작별을 고했을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다 : 그러나 그의 적이 그를 세상에 묶어놓았고, 그의 적이 그를 끊임없이 생존하도록 유혹했으며, 그의 분노는 고대 견유학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청량제였으며, 그의 휴양과 보수, 그의 구토 방지제와 행복이었다.”(니체, 《도덕의 계보》, 463~464)

사실 길게 인용한 이 구절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리를 하려고 다시 책을 펼쳐보다가 새삼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근원적인 ‘의지’의 작용이라고 보았습니다(이때 의지란 현상 세계의 모든 것들을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을 지배하고 있는 ‘의지’는 우리의 개별적 실존을 초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의욕과 결핍에 끊임없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충족을 모르고 달려가는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고통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이나 종교를 통해 개체적 실존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의지 자체에 대한 ‘무관심한 직관’에 이를 수 있을 때에만, 의욕이라는 익시온의 수레바퀴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죠.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평화를 깨는, 의욕에 사로잡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대고 니체는 말합니다. 사실은, 너의 적들이 너를 살게 한 것이라고. 가끔씩 제가 코드가 안 맞는 사람들,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말을 건네는 일 자체를 단념해버리곤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꼭 모두와 잘 지낼 필요는 없잖아’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면서, 사실은 제 주변이 모두 저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 세팅된 이상적 환경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모든 것들이, 즉 우리의 적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쇼펜하우어에게 그를 괴롭히는 성욕이나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던 헤겔 같은 적들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욕망이나 관능과 싸우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아예 사유를 시작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적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니체 말대로, 어떤 적대적인 외부자극도 없는 상태란 죽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무엇과도 싸우려들지 않고,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긍정’은 어쩌면 삶의 모든 잡음들을 제거하고 우호적인 ‘나’의 영역을 지키려는 동일자적 욕망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니체의 긍정은 훨씬 더 발칙하고 공격적입니다. 니체는 고통을 부정하지도 않고 불화를 못 본 척 하지도 않습니다. 부단한 투쟁이야말로 생명의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아니, 이러한 불화와 투쟁이 삶의 조건임을 받아들이는 것, ‘평화’나 ‘화해’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니체의 긍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고통과 불화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한계’라고 여기는 체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삶에는 무엇 하나 빼버려도 될 것이 없음을 사유하는 것이죠. 이러한 삶에 대한 무제한적인 긍정의 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적 도덕에 깃들어 있는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째 토론 내용에 충실하지 못한 후기가 되어버렸네요(^^;).

다음주에는 《도덕의 계보》를 510쪽 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전체 2

  • 2019-04-14 13:31
    고통, '나의 친애하는 적'.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 2019-04-14 19:48
    충실치 못하신 후기가 니체를 독학으로 조금씩 읽어나가기만 했던 저에게는 귀에 쏙 들어오네요^^
    그 주 공부를 정리할 수 있게 해주시는 후기 매주 잘 읽고 있습니다
    화요일에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