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도덕의 계보 마지막 시간(04.3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29 10:35
조회
126
드디어 《도덕의 계보》를 다 읽었습니다! 이번 시즌은 평소보다 인원도 적고 기간도 짧고 분량도 적었는데, 그랬던 만큼 더 밀도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6주 간의 세미나를 정리하는 글을 써오시면 됩니다. 도덕을 문제 삼는 니체의 독특한 관점을 정리해보고 그러한 관점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다르게 보기를 시도해보는 정도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니체의 결론을 반복하거나 니체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 생각합니다! 정리의 형식이 되었든 질문의 형식이 되었든 조금이라도 ‘다르게 생각하기’를 시도해봅시다ㅎㅎ

“과학에 대한 신앙이 전제로 하고 있듯이, 저 대담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진실한 인간은 그 신앙에 의해 삶의 세계, 자연의 세계,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긍정한다. 그가 이러한 ‘다른 세계’를 긍정하는 한, 어떻게 되는가? 그는 바로 그것에 의해 그 세계와는 다른 것, 즉 이 세계, 우리의 세계를―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526~527쪽)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기독교에 반(反)하는 현대적 학문들에 대한 니체의 평가였습니다. 합리적 정신으로 무장한 과학, 이성을 비판하는 철학, 해석과 가치평가를 단념한 역사학. 이러한 현대적 정신들은 신과 죄와 내세를, 세계에 대한 종교적이고 인간적인 가치평가를 미신과 오류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생리학자의 시선으로 볼 때 사실 이들은 한통속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합리적 정신들이 여전히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당대의 과학, 역사학, 철학을 추동하는 합리적 정신은 여전히 오류와 모순으로 점철된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어떤 ‘참된 세계’를 요청한다는 것이죠. 순수하게 논증 가능한 것으로서의 세계, 아무런 가치평가도 하지 않는 중립적 인식, 인식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물 자체 같은 것들을 전제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을 전제하고 요청한다는 것은 오류와 기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생성변화 하는 ‘이 세계’를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합리성으로 무장한 현대적인 정신과 금욕주의적 이상이 동일하게 “생명의 빈곤화”라는 기반 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하강하는 삶의 징조”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양자는 모두 ‘삶에 반하는 삶’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최근 비기너스 세미나에서 읽고 있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이와 연관된 내용이 나옵니다.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특히 칼뱅주의)은 “신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만이 절대적이고 인간은 그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력하며 또 현세는 오로지 내세에서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극단적인 이상주의는 기독교 교리를 ‘합리화’하는 동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신은 인간의 이해 가능성을 초월해 있으며 자신이 원할 때에만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지고한 초월자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인간이 신의 뜻을 대리하거나 인간 쪽에서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종교적 의례나 교리를 미신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들은 고해성사나 폐쇄적 수도원 생활, 정서적인 신앙 체험 같은 것들을 부정하고 합목적적인 사회질서를 형성하고 조직하는 것만을 자신들의 종교적 임무로 여겼습니다. 니체가 지적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합리화’를 추동한 것은 ‘참된 세계’를 ‘지금 이 세계’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금욕적 이상주의인 것이죠. 니체는 말합니다. 합리적 정신이 기독교 교리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독교 도덕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니체가 ‘도덕’을 문제 삼아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쓴 것은, 도덕 일반을 부정하기 위함도 아니고 반反도덕주의자가 되자고 말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느끼고 욕망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힘을 낯설게 보고자 시도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니체는 도덕을 삶의 징후로, 특정한 존재 방식과 삶의 양식의 표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이미 유럽인들의 본능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른 기독교 도덕과 싸웁니다. 우리도 우리의 본능을 형성하고 있는 가치 판단과 싸워야 할까요? 우리 자신의 도덕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까요? 아니면 니체를 읽고 무언가를 써보려고 하는 지금 우리도 이미 니체의 싸움에 말려들기 시작한 것일까요?

또 공지가 늦어버렸네요. 내일 간식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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