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월 11일 카프카 두 번째 세미나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8-01-14 20:19
조회
105
오손도손 둘러앉아 내가 읽은게 도대체 무엇인가... 함께 당혹스러움을 나누던 목요일이었습니다. 체포는 되었으나 그 이유도 앞으로 절차도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 <소송>. 읽기는 하였으나 그 흐름도 주제도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소송>. 그래도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 작품을 어떻게든 해석해보려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 법 앞에서 

<소송>에서 요제프 카는 법과 마주합니다. 그의 방에 나타나 선고를 내리고, 그의 삶에 자꾸 끼어드는 법. 누가 그 선고를 명령했는지, 누가 법을 작동하는지 카는 알려고 합니다. 그는 '배후 세력' , 고위 책임자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송 내내 카가 만나는 건 정작 법의 가장자리에 있는 하위 공무원, 하급 변호사, 법원 소속 화가며 신부, 혹은 비슷한 처지의 피고인들 뿐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카프카는 법을 어떻게 생각했던걸까요? 마지막 즈음 성당에 들어간 카에게 신부가 들려준 이야기, 법 서문에 적혀있는 이야기 <법 앞에서>를 보면 법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먼저 법은 분명 있지만, 그 내용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다고 하지만, 지금 법 안에 들어가는 건 안 되고, 적어도 세 명이 넘는 문지기가 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광채를 보기도 하지요. 이런 특징을 지닌 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걸까요? 법 안에서 흘러나온 광채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안 돼! 라고 말하며 작동하는 법에 시골 사람은 매혹됩니다. 그는 법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지기에게 자꾸만 물어봅니다. 시골 사람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요제프 카도 소설에서 몇 번 질문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는데, 그렇다면 카는 시골남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요? 법과 질문은 어떤 관계로 풀어볼 수 있을까요?

그런가하면 <소송> 안에서 법은 촘촘히 사람들의 삶에 스며있습니다. 법은 방 안에 침투해있습니다. 법을 전달하는 심부름꾼 두 명은 요제프 카의 [방]에 찾아와 선고를 내리고, 화가 티토렐리의 침대 바로 밖은 법정 사무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예술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법과 얽혀있습니다. 대성당에서 만난 신부 역시 법정 소속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마저 법정 소속이라고 티토렐리는 말합니다. 한 번 이 망에 걸려든 이상, 카는 그 밖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가 맺는 모든 관계는 법을 통과해 이루어지는거나 마찬가지이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를 이미 '소송 중인 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소송이 자기 삶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아차린 카는, "이 세상에서 혼자 살고 있다면 소송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다면 애당초 소송 같은 건 일어날 리도 없었을 것이다"(134)라고 깨달은 카는, "소송 한 가운데 서서 버티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변호사를 통해 법을 마주하는 대신 직접 진정서를 작성하고 맞서기로 합니다. 카는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비로소 서로 알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226)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법은 어떻게 이렇게 촘촘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려있는것이며, 어떻게 사람들이 관계맺는 방식을 정하고 있는걸까요? 그러나 겨우 변호사와 계약을 해약하고 진정서를 직접 쓰기로 결심한 그에게 소송이 내려진 지 딱 일년 후, 서른 한 번 째 생일 전날, 종말이 찾아옵니다. 그가 맞이한 종말은 개 같다고 느껴지는 죽음입니다.

# 개 같은 죽음, 그리고 치욕

그러나 무죄를 증명하려 스스로 나선 카는 결국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는데, 강석샘이 지적하셨듯이 이 죽음이 저는 카프카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죽음과 어쩐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직접 다리를 건너 체조선수처럼 뛰어내리는 <선고>의 게오르그나,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단식광대 등과 다르게 온 몸이 붙들리고, 저항하지 못하고 맞이한 죽음이거든요.  카는 칼에 찔리고 나서 " 개 같군" 이라고 외칩니다. 그가 죽은 후 치욕만이 남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건 요제프 카가 아닐수도 있죠) 치욕만이 남을거라 말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법을 빠져나가려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 치욕스러운 일일까요? 아무리 애써도 빠져나갈 수 없는게 치욕인걸까요? 카는 죽기 전 자기가 마지막 과오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는데, 그가 생각한 자신의 과오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요제프 카!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소송>에 두 번 등장합니다. 나가려던 그를 불러세우는 대성당의 신부, 그리고 뷔르스트너 양 앞에서 재연에 심취해 스스로가 부른 자기의 이름, 요제프 카! 이 호명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이름을 부여받고 사는데, 그 이름을 부르는 이를 우리는 무시하지 못하고 그의 부름에 응답할수밖에 없는걸까요? 그리고 남이 붙여준 이름을 스스로도 부르며 살아가는 걸까요?

 

선민샘은 <소송>이 움직이는 미로같은 작품이라고 하셨습니다. '저기 가면 어떻더라'하는 설정값도, 기대치도 없이 그저 주인공은 움직이고 또 움직입니다. 움직여서 어떻게 어떻게 들어간 미로는 자꾸만 모양을 바꿔갑니다. 움직이는 미로를 따라, 요제프 카 역시 움직입니다. 가다가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이전에 고용한 변호사를 해약하기도 하고, 그렇게 걷다 걷다 만들어지는 이동 경로를 따라 갈 뿐입니다. 움직여서 풍경을 발견하는 일, 미로를 따라가며 그 안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드는 일, 그 일을 통해 비로소 법망에서 스르르 빠져나갈 수 있는걸까요? 광장이 아니라 골목, 한 가운데가 아니라 골목길만을 그린 <소송>은 그래서 전체적인 조망도를 그리며 읽기보다 그저 부분부분을 해석해 그 조각을 꿰어내는 방식으로 읽는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성된 형태도 매뉴얼도 없기때문에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도 어떤 식으로 조각을 꿰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점!

다음 시간에는

1) <성> 그리고 단편 <소송>, <포세이돈>, <일상의 혼란>을 읽어오고

2) 내가 생각하는 법에 대해 짧게 정리해오기로 했어요.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과연 풀릴지는 미지수이지만) <소송> 한 작품만 하더라도 곳곳에 아주 많아 다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른 장편과 단편을 읽으며 다시 하나하나씩 붙잡아보기로 해요.. 여전히 알쏭달쏭하지만... 계속 따라 걸어보아요!

저는 지금 <성>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소송>만큼이나 만만치 않네요.  다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 시간에 만나 또 다시 당황스러움을 나눠보아요!  그럼 목요일에 만나요!!
전체 3

  • 2018-01-16 07:26
    K는 관찰자가 아니다! 그는 산책자다! K가 세상을 관조하고, 재단하며, 평가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정말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카프카는 쉬지 않고 공간 내부를 움틀거리게 하려고 작심한듯 합니다. '개 같음'의 치욕을 <<성>>을 통해 더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요제프 K의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을 이 '치욕'은 어쩐지 유령 사냥꾼 그라쿠스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에니웨이, 세미나 첫 시간부터 열기 폭발! ^^

  • 2018-01-16 08:38
    그것은 도처에 있다. 기묘하게 널려 있다. 손안에서 유령처럼 꼬리를 물며 빠져나간다. 그것은 바로 카프카의 법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미로에서 실종될 것 같습니다. ~~~~~

    • 2018-01-16 10:06
      '그것'은 카프카가 돌아다니면서 만드는 구멍?! 벽을 문으로 만드는 카프카의 세계는 어디든 길이 될 수 있는거 같아요. 담주에도 미로에서 실컨 헤매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