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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세미나(4); 우리는 어쩌다 형제로 태어나_세 갈래 길로 간 삼형제 & 일곱 마리 까마귀

작성자
김현정
작성일
2017-11-09 01:22
조회
69
세 갈래 길로 간 삼형제 & 일곱 마리 까마귀

‘한 어머니 배에서 나왔어도 성질이 다 달랐지’ 형제마다 각기 다른 성격을 심리학자 아들러는 출생순위와 가족 내에서 아이의 위치로 설명한다. 이는 비슷한 유전자 정보나 양육환경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형제는 전혀 다른 욕망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번 형제에 관한 동화에서도 발견된다. <세 갈래 길로 간 삼형제>에서 맏이는 마음이 너그럽고 남 도와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둘째는 힘이 세고 다혈질적이며, 막내는 똑똑해서 글공부를 잘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성격은 그들의 욕망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결과, 형제들의 삶의 길도 갈라지게 된다. 먼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이는 둘째다. 다혈질적인 성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힘센 장정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뎃길을 선택한다. 우락부락 남을 곧잘 때려눕히고 하던 만큼, 힘을 겨루고 싶어 안달 난 듯하다. 그 다음, 맏이는 남 돕기를 좋아하는 성정대로 늙은이 혼자 사는 집이 있는 오른편 길로 간다. 그리고 시체가 셋 있는 왼편 길로 들어선 똑똑한 막내는 그 특유의 호기심을 발동시킨 듯하다. 어느덧 삼년의 시간이 흐르고, 형제는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똑똑한 막내는 판관이 되었고, 힘자랑을 좋아하던 둘째는 도적이 되었고, 노인을 성실히 봉양했던 맏이는 부자가 되었다. 각기 다른 욕망의 흐름이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3년이면 충분하다고 동화는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3년은 해볼 일이다. 그런데 3년이란 시간이 만들어 낸 형제의 모습은 그들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각기 다른 그들의 욕망의 흐름이 각기 다른 사건들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우연성이 개입한다. 가령, 맏이가 봉양했던 노인이 부자가 아니었다면, 둘째와 막내가 만났던 이들이 산적 떼와 사또가 아니었다면 이들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다. 결국 욕망의 필연적 흐름과 우연한 만남의 개입이 이들 형제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 갈래 길로 간 삼형제>에서처럼 형제들이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일곱 마리 까마귀>에서 나오는 일곱 명의 아들들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욕망의 흐름 안에 있다. 아버지라는 권위와 질서에 복종하며,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서로 경쟁한다. 아버지가 갓 태어난 막내딸의 세례에 쓸 물을 길어오게 하자, ‘다들 자기가 제일 먼저 물을 길어 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동화에서는 이 아들들처럼 동일한 욕망의 회로에 갇혀 있는 형제들은 대체적으로 동성(同姓)으로 그려진다. 반면, 이질적 욕망의 흐름을 갖고 있는 또 다른 형제는 이성(異性)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일곱 마리 까마귀>에서도 막내딸은 ‘그러나 아직 딸이 없었으므로 딸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버지의 또 다른 욕망의 흐름 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태도는 아들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이 구축한 영토성에 포획되어 코드화된 아들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사용한다. 시간 안에 자신의 영토성안으로 복귀하지 않은 아들들에게는 ‘그 녀석들 모두 까마귀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냉정하고 가혹하다. 그러나 딸에게는 자신이 내린 저주로 까마귀가 되어 추방된 오빠들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애지중지한다. 새로 생산된 욕망은 기존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태도와 행동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영토 안에서 아들들을 지키지 못한 실패를 보완한 새로운 방법적 대처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아버지의 새로운 욕망이었던 막내딸은 다시 아버지나 오빠들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욕망을 갖게 된다. 자기 영토성을 고집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라는 영토성 안에서 안주하며 경쟁하던 오빠들과 달리, 영토에서 추방된 오빠들이 마음에 걸려서 그들을 구하고자 욕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막내딸의 이 욕망은 아버지의 영토인 집을 ‘몰래’ 빠져나가 넓은 세상으로 길을 떠나게 한다. 이 여정에서 막내딸은 ‘자신의 작은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문의 열쇠로 삼는 등, 자신의 신체성도 변용하고 있다. 그리고 까마귀가 된 오빠들은 부모가 아닌, 자신들의 누이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 하느님! 제발 우리 누이동생이 왔다면, 우린 구원을 받을 텐데” 집에서 추방되어 영토를 떠나서 사는 동안, 그들은 아버지라는 영토성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들과 유사한 코드를 지녔지만, 아버지와는 다른 존재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오빠들과 누이동생은 부모의 반지로써 서로가 형제임을 확인한다. 여기서 부모의 반지는 동일한 코드를 보증하는 증표이다. 형제란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서서, 같은 코드를 지닌 사람들임이 암시된다. 드디어 사람이 된 오빠들과 누이동생은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간 집은 예전 아버지의 영토였던 옛날의 집은 아니리라. 집을 떠나 까마귀로 생활했던 오빠들과 막내딸의 길 위에서의 여정은 그들이 공유했던 코드들도 변화시켰음에 틀림없다. ‘일곱 번째 까마귀가 잔을 비우자 반지가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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