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3강(06.17)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19 17:59
조회
168
1. 사건과 개념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서론을 빼면 첫 번째) 고원인 “1914년―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의 각 고원(챕터)에 제목과 함께 날짜를 적어 놓았는데, 1914년은 프로이트가 ‘늑대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의 환자를 분석한 해입니다. 이렇게 날짜들을 적어놓는 것에는, 개념을 본질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정황)과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자신들을 촉발시킨 구체적인 사건들과 무관한 어떤 신비로운 보편성 속에서 자신들의 개념을 전개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도와 달력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는다”라는 푸코의 말도 떠오르네요.

저는 이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아주 구체적인 사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펼쳐낸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철학하는 방식에는 구체와 추상을 대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이라고 믿는, 비철학적이고 일상적이고 습관화된 사유는 사실 보편성을 자임하는 숙고되지 않은 가치들과 개념들을 가지고 온갖 구체성들(외부성들?)을 뭉뚱그려버리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뭘까요? 사고의 수목적 고착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유에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 작동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추상과 구체가 동시에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는, 니체를 읽다보면 개념이 (그러니까 철학이) 사건과 더불어 생성되는 것이라는 이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바그너와의 만남과 결별, 에피쿠로스와 몽테뉴, 괴테와 스피노자, 플라톤과 루소, 파스칼과 쇼펜하우어 같은 텍스트들과의 상호작용, 그리스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독일적인 것 등등의 힘들과의 마주침, 니체가 ‘현대성’과 벌인 투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니체의 병과 건강과 무관한, 순수한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니체의 철학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정말로 리좀인 것이죠.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뿌리로 수렴되지 않고 온갖 사건들, 마주침들 속에서 펼쳐지는 동시에 형성되어가는 중에 있는 철학. 니체는 그가 겪고 있는 것들, 극복해낸 것들과 무관한 것들, 순수하고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는 삶과 철학이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죠. 들뢰즈는 “사상을 위한 일보(一步)와 생을 위한 일보가 결합된 통일성”(『들뢰즈의 니체』, 30쪽)이라는 말로 니체의 철학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사건들 속에서 생성하고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건 뭘까요? 가령 니체의 텍스트를 사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건 저자 니체의 전기적 사실들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환원시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저자 니체로 환원되지 않는 텍스트의 외부성들, 그것이 놓인 시대, 배치,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투쟁 등등과의 관계 속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읽는 자인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독자와 텍스트의 마주침이라는 사건 또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외부성의 하나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문제는 텍스트의 오독을 경계하며 순수한 본질을 채굴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텍스트를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맹자는 독자가 갖춰야 할 태도를 ‘以意逆志’라는 말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깊이 숙고함으로써 저자의 뜻(=텍스트)를 맞이하는 것. 사유에도 독서에도 올바른 모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텍스트로 하여금 도주로를 발명하기 위한 무기가 되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유일한 문제입니다.

“내가 틀어쥔 문제가 <고원>을 횡단하는 원동력이다. 고원들을 가로지르면서 문제를 복수화(複數化)하고, 탈주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탈주에 따르는 위험성을 숙고하는 것. <고원>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촉발되고 있는지를 물을 것. 요컨대, <고원>을 읽는 것 자체가 ‘되기’의 경험이다.”(채운샘 강의안, 2쪽)

2. 다양체

이번 강의를 들으며, ‘치료’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물론 ‘늑대인간’의 경우에는 치료를 실패했지만요. 프로이트에게 치료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환자의 무의식을 해명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늑대가 나오는 악몽을 자주 꾸는 돈 많은 러시아 청년이 신경증을 호소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을 때, 프로이트는 환자의 신경증의 ‘원인’들을 찾아냈습니다. 유년시절, 두 살 많은 누나가 “우리 엉덩이 보여주기 하자”라며 환자를 성적으로 유혹한 일, 한 살 반가량이었을 때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것으로 추정 되는) 일을 들어 환자가 그렇게 ‘잘못되어버린’ 이유를 밝힙니다. 그리고 환자가 시달리는 고통과 설명할 길 없는 환상들을 가족적 표상에 끼워 맞춥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해냈지만, 곧바로 다시 그것을 의식에 종속시켜버렸습니다. 촘스키가 문장을 쪼개고 쪼개서 문장을 이루는 각 부분들로 하여금 하나의 선험적 통일성에 복종하도록 하고 문장으로부터 의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환자의 무의식을 미세하게 해부하고 거기에 온갖 표상들을 대응시킴으로써 무의식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성욕이 되었건, 근친상간 충동이 되었건,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되었건 ‘설명’이 가능하다는 건 우리에게 안정감 같은 것을 줍니다.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견디지 못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니까요. 그런데 어쩌면 본능들과 충동들, 의식되지 않는 것들을 의식 아래에 (다시 말해 이해 가능한 설명체계 아래에) 가두어두려고 하는 이런 편집증적 충동이야말로 어떤 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프로이트적 의미의 치료란 무의식으로 하여금 의식에,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그의 무의식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정신분석가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종이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질수록 그의 치료는 더욱 완전한 것이 되겠죠.

들뢰즈-가타리가 프로이트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성욕에 대해 말하기 때문도 아니고 프로이트의 분석이 설득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무의식을 인간적인 표상들로 환원해버린다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늑대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을 정색하고 반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는 원래 무리지어 다닌다고.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의 꿈에 나온 늑대들을 인간-주체의 개인적 트라우마로 환원해버립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얀 늑대를 하얀 양으로, 하얀 양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의 문제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대체합니다. 그러다 심지어는 꿈에 등장하는 늑대가 다섯 마리라는 사실조차 유년기의 억압된 기억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해석해버리죠. 이에 들뢰즈-가타리는 묻는 겁니다. 정말이지, 늑대가 그냥 늑대여서는 안 되는 거냐고, 늑대는 원래 무리지어 다닌다고, 늑대는 설명되어야 할 상징이 아니라고.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무의식은 다양체(=떼=무리)입니다. 무의식은 ‘나’라는 자아로 환원되지 않는 온갖 힘들이 우글거리는 무리의 서식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그러한 힘들을 느끼는 존재일 뿐입니다.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온갖 이질적 힘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속도와 방향성뿐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에는 니체와 아메리카 인디언과 부시맨과 나무와 광물과 늑대가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명명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힘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힘들을 경유하면서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나’라는 동일성은 그러한 차이들의 종합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프로이트의 분석이 모든 차이들을 ‘엄마-아빠-나’로 이루어진 주체의 개인적인 무의식으로 환원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달리 들뢰즈-가타리는 주체를 사회와 역사와 자연을 향해, 이질적인 힘들에로 열어냅니다.

문제는 ‘무의식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무의식을 다양체로 설명할 때, 프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진단과 치료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적인 의미의 치료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상성에 대한 관념과 무관한 치료일 것입니다.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러한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것과 화해함으로써 정상적이고 안정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출구를 발명하는 것입니다. 늑대인간은 왜 아픈 걸까요? 그의 신경증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음을 표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들 때문에 그의 무의식이 ‘정상적으로’ 형성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지금 그가 자기 안에서 인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힘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징후입니다. 인간적인,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무엇과의 불화가 그렇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겠죠.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게 치료란, 잃어버린 통일성과 정상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는 것이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의 치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료는 “프로이트에 복종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느낌들을 일단 이해하는 데서 출발”(채운샘 강의안)합니다.
전체 4

  • 2019-06-20 12:23
    주체를 사회와 역사, 자연 등 이질적인 힘들이 종합된 장으로 이해한다는 데에서 스피노자도 떠오릅니다. 무한한 힘들에로 열어내는 나, '치료'와 '더 나아가기'를 이 지점에서 다시 고민해야 겠구만요. 앙앙!!

  • 2019-06-20 12:32
    우리의 병들은 추성과 구체와 같이 '일'과 '다'로 대립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서 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런 사고 패턴을 비판하는 다양체라는 개념이 재밌었습니다. 생성과 운동 속에서 뭔가를 포착한다는 것. 변용하고 변용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을 사유한다는 것. 다양체란 개념을 어떻게 구체적인 장 속에서 펼쳐낼지가 문제네요~자신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서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개념들을 작동시키기.

  • 2019-06-20 13:00
    저에게 당면한 것들을 생각할 때는 '출구'를 떠올리기 보다는 예상되는 것들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선택하면서 뭔가를 감수하는 식으로밖에
    생각이 정리되지 않네요. 다만 내가 떠올리는 불편한 과거의 기억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가벼워질 것이라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
    문제는 그 기억에 붙들려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2019-06-22 10:39
    온갖 설명 안되는 것들인 무의식의 본능들과 충동들을 의식 아래 가두려 하고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하게 만들려 하는 편집증적 태도가 오히려 병적인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와닿습니다.
    그 설명이 맞든 틀리든 인간은 원인이 없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무엇이든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강박 아래에 다양함을 이해하지 못하는(이해하려 하지 않는) 무능력이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