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4강(06.24)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6-28 00:53
조회
312
들뢰즈에 따르면 사유의 적(敵)은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이때 들뢰즈가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앎의 결여가 아니라 배움의 운동에 대한 거부입니다. ‘운동’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배움이란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익숙한 인식의 지반을 허물어뜨리는 폭력적인 마주침들에 직면하여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유의 지평을 변형시키고 확장시켜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그런 점에서 제도교육이란 지식을 주입함으로써 배움을 질식시키는 장치가 아닌가 싶네요). 사유의 운동을 거부하고 어리석음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는 언제고 다시 ‘n+1’의 사유로 돌아오게 됩니다. ‘본질’, ‘기원’, ‘목적’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붙들린 지점에서부터 질문하고 돌파를 시도하는 과정을 대체하려드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본질, 기원, 목적을 운운하는 온갖 종류의 이상주의는 모두 허무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주의의 민낯은 세계를,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역량을 믿지 못하는 무능력/어리석음이기 때문이죠.

사유한다는 것, 어리석음과 싸운다는 것은 다양체(n-1)를 구성하는 일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채운샘이 계속 강조하신 부분이지만, 다양체는 항들의 개수와 무관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무한한 선택의 폭을 제공하죠. 그러나 선택지들 앞에서 우리는 ‘소비하라!’라는 단 하나의 명령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의 욕망은 획일화되고 예측 가능하게 되어버리죠. ‘선택의 폭’이라고 쓰고 ‘더욱 다양한 상품들’이라고 읽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만족을 구성할 자유에 대한 탄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수적인 다양함은 외부성에 대한 봉쇄를 보지 못하게 하는 미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 같은 아름다운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양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양체를 정의하는 것은 ‘그리고et’입니다. 개별적인 항들이 아니라 각각의 항들을 가로지르는 동시에 그러한 항들에 외재적인 ‘관계’를 사유해야 합니다. 가령 ‘피에르는 폴보다 작다’라는 문장에서 각각의 항인 피에르와 폴은 ‘작다’거나 ‘크다’고 하는 본질을 지닌 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외재적인 ‘관계’에 의해서 피에르와 폴은 ‘작음’과 ‘큼’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다양체’라는 개념은 그것을 이루는 모든 외부적인 것들과의 상대적으로 나뉠 수 없는 거리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를 바라보도록 합니다. 한 마리의 늑대는 그 안에 늑대 무리와의 고유한 거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종은 세포에 침투하여 RNA에서 DNA로 정보흐름을 역전사함으로써 DNA를 바꾸는 바이러스에 의해 변이-진화합니다. 하나의 집단이 지닌 역량은 ‘바깥의 바람’을 통해 전염되고 변이할 수 있는 힘에 의해 정의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하나의 전체, 본질, 일자에 종속된 형용사로서의 ‘다양함’이 아니라 “매 사물에 거주하는” 명사로서의 다양체를 사유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다양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이것도 되어보고 저것도 되어보는 식으로,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으로 이동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도주하는 것, 경계를 나타내는 홈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 자신의 다양체적 역량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붙들어두고자 하는 고정된 힘들, 즉 땅의 확고부동한 힘들을 배반”하는 것. 그런데 또 채운샘이 자주 강조하시는 것이지만, 도주의 실험에는 언제나 ‘신중함’이 요청됩니다. 아무 것에나 아무렇게나 반응하는 것은 전혀 도주가 아닙니다. 18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연한 마주침을 기다릴 줄 아는 진드기의 역량. “세계의 시그널을 포착하고, 기다리고, 감당”(채운샘 강의안, 5쪽)하는 것이 ‘실험’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몸체만큼이나 영혼도 병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경증과 불안, 애지중지하는 자세, 삶에 대한 원한, 불결한 병균을 우리에게 전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놓아줄 것입니다. 흡혈귀들처럼 말이죠. (…)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역병을 피하고, 마주침들을 조직하고, 행위 역량을 증가시키고, 기쁨을 변용하고, 긍정의 최대치를 표현하거나 감싸는 변용태/정동들을 다양화하기란 쉽지가 않아요. 신체를 유기체로 환원되지 않는 역량으로 만들기. 사유를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역량으로 만들기.”(질 들뢰즈, 《디알로그》, 118쪽)

정말이지,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요? ‘사유를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역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견고한 지층들을 허물어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 배운 세 번째 고원의 제목은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입니다. ‘도덕의 지질학’이라니, 낯설고도 재밌는 제목입니다. 이런 독특한 제목은 “인간주의에 빠지지 않고, ‘생명’이라는 보편적 차원에서 사회와 정치, 도덕을 설명”(채운샘 강의안)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시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가 온갖 ‘인간적인’ 범주들에 의존하여 세계를 출현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 자연과 인간, 인식과 실천, 주체와 대상, 언어와 사물 …… 그런데 이런 당연해 보이는 범주들을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유를 의식으로’ 환원시키는 도덕주의자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익숙한 인간적인(=도덕적인) 영토로 회귀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니체가 괜히 인간적인 전제들과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겠죠.

“생명권이나 정신권은 없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하나의 동일한 <기계권>이 있을 따름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민음사, 137쪽)

들뢰즈-가타리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정신과 신체 등등의 인간적인 범주들을 모두 거부하고 세계 안의 모든 것들을 ‘작동’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기계’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기계와 인간 사이에 대립을 설정하는 것은 기계를 ‘자동성’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몽동에 따르면 기계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자동성’이 아니라 ‘비결정성’입니다. “하나의 기술적 앙상블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정보에 대한 기계들의 이런 감수성에 의해서지 자동성의 증가에 의해서가”아니라는 것, 생명과 마찬가지로 기계의 역량도 스스로의 조건을 해석하고 환경을 창조하고 ‘적응’하는 변용의 역량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지구는 기관 없는 몸체입니다. 무생물과 생물, 물질과 비물질, 사물과 관념 등등의 실체적 범주들로 구별된, 이미 조화롭게 질서지어진 유기적 구성체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죠. “‘탈영토화되고’, ‘빙원이고’, ‘거대분자’인 지구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체”이며 “이 기관 없는 몸체를 가로질러 가는 것들은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불안정한 질료들, 모든 방향으로 가는 흐름들, 자유로운 강렬함들 또는 유목민과 같은 독자성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친 입자들”(85)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관점에서 지구는 어떤 형식을 가지고 조직화되지 않은 흐름들이 미리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내재적 평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러한 미규정적 질료들과 더불어 ‘지층화 작용’이 이루어집니다. 말 그대로 모든 방향으로 흐르던 흐름들이 빽빽해지고 견고해지면서 준 안정적 단위를 이루게 되는 것. “지구의 한편에는 영토화하고 코드화하는 분절 작용(‘심판’)이(지층화), 다른 한편에는 심판을 벗어버리고 달아나고 탈지층화, 탈코드화, 탈영토화하는 운동이(기관 없는 몸체)”(채운샘 강의안)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워지는 부분은, 들뢰즈-가타리가 지층화를 두 차원으로 나누는 부분에서부터입니다. 지층화는 언제나 이중적으로 이루어집니다(이중 분절double articulation).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은 우리가 흔히 ‘정신’, ‘관념’, ‘언어’ 등으로 말하는 차원을 ‘표현’이라는 말로, ‘물질’이나 ‘신체’라고 하는 차원을 ‘내용’으로 지칭합니다. 분명히 인간이 감각하는 세계에는 담론적 차원과 비담론적 차원, 정신적 차원과 신체적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두 차원을 ‘내용/표현의 이중분절’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지층화’라는 일관된 관점 속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두 층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두 차원을 나눌 때 ‘내용/형식’의 구분을 따릅니다. 신체는 ‘나’를 이루는 틀이자 형식이고 나의 자아, 정신, 의식, 영혼은 좀더 본질에 가까운 ‘나’의 내용이라는 식으로요. 가령 소설에 대해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죠. 특정한 스타일, 형식, 틀 속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식의 이미지.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는 기준은 너무나 모호합니다(문체와 별개의 내용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신체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정신 같은 것이 있을까? 같은 질문들). 게다가 이런 관점은 언제나 내용의 차원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가치평가가 전제되어 있죠. 이렇게 바라볼 경우에는 내용(=영혼)의 차원에 우월성을 부여한 ‘신’을, 지구라는 이 기관 없는 몸체 너머에 다시 불러오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들은 내용/표현의 구분을 따릅니다. 가령 이들이 보기에 소설이란 종이와 잉크를 비롯한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내용형식과 그러한 질료들의 배열과 조합이 야기하는 언어적인 효과로서의 표현형식으로 구분됩니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일치 관계도, 인과관계도, 기표-기의 관계도” 없습니다. “실재적인 구분, 상호전제, 그리고 동형성”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종이와 잉크가 없다면 소설의 의미작용도 없을 것이고, 표현형식의 차원과 더불어서만 내용형식은 그러한 방식으로 지층화될 수 있었겠죠. 이렇게 내용/표현의 구분을 따를 때 우리는 기원이나 본질이 아니라 ‘배치’를 문제 삼게 됩니다. 가령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기술의 발전에 의한 생산력의 증가를 ‘원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으로 볼 때 표현형식과 무관한, 독립적 원인으로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기술의 발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탄생이란, 역사의 특정한 순간에 우발적 사건들과 더불어서 담론적-비담론적 배치 전체가 변이를 겪게 된 것을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배치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는 기술발전의 폐해나 부작용을 문제 삼거나 경제적 논리의 모순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선 지금 우리를 둘러싼 담론적-비담론적 배치물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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