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천개의 고원> 읽기 시즌 1 - 5강(7.1)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7-04 15:35
조회
154
지난주에 이어 지층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개념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층 개념이 《천 개의 고원》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 중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확히 지층 개념이 무엇을 다르게 보게 해주는지, (탈)영토화/(탈)코드화라고 말할 때와 지층이라고 말할 때의 차이는 무엇인지, 지층 개념이 ‘도덕의’ 지질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내용/표현의 이중분절은 무엇을 위한 개념인지 …… 아무튼 지층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번 강의를 듣고도 확 감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이해한 부분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철학은 ‘존재Being’와 ‘동일성Identity’의 개념과 싸웠다고 합니다. ‘있다’ · ‘~이다’라는 고정된 점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플라톤 이후의 철학적 전통이 현대철학의 공통된 적이었습니다. 이와 싸우며 비결정성, 회색점, 비안정성, 비동일적 존재를 사유의 대상이자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현대철학의 과제였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도 들뢰즈나 푸코는 구조주의와 투쟁을 벌였습니다. 물론 이는 들뢰즈, 푸코가 구조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구조주의는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조주의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존재’나 ‘주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a를 a로 출현하게 한 조건, 각각의 항들을 규정하는 ‘관계’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조주의가 ‘관계’를 정태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외부성들을 사유로부터 추방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구조를 구성하는 규칙들의 체계만을 강조하다보니, 구조 자체의 변이를 사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은, ‘구조주의에는 역사가 없다’라는 한 마디로 이러한 난점을 지적합니다. 구조주의에는 구조와 또 다른 구조만이 있을 뿐, 구조와 더불어 존재하며 구조를 변이시키는 ‘바깥’은 없습니다(이때 ‘바깥’이란 구조의 외부라는 뜻이 아니라, 구조 자체에 내재하지만 이미 형성된 규칙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탈하는 힘으로서의 외부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태적 사고는 결국, 구조주의로 하여금 거부하고자 했던 ‘존재’와 ‘동일성’을 다시 (다만 이번에는 존재나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도입하게 만들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뢰즈나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구조주의에 대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이처럼 구조주의가 ‘역사’와 ‘사건’과 ‘혁명’을, 결정적으로 ‘바깥’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구조주의가 이야기할 수 없었던) 구조의 역동성을 사유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하면서 구조를 넘어가고자 했고,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전유함으로써 사유에 역사성을 도입하고자 했으며 들뢰즈-가타리는 지층, 배치, 리좀 … 등 우리가 함께 고민해보게 될 개념들을 통해 구조와 구조를 이탈하는 힘(바깥, 사건)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은 부분과 전체,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사유하도록 합니다.

채운샘은 ‘환경’을 예로 들어주셨는데요, 우리는 흔히 ‘환경’을, 마치 그림의 ‘배경’처럼 개체들 외부에서 개체들에게 영향을 가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부’로서의 ‘나’와 ‘외부’로서의 ‘환경’을 나눠놓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환경’을 구성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고, 또 우리는 우리가 ‘환경’이라고 부르는 외부의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외부’와 ‘내부’는 뗄 수 없이 동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외부와 내부의 차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차이가 없다면, 아무런 구분도 없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침투하고 우리를 통과해갈 뿐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겠죠.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비평형)’란, 외부와 내부가 따로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매번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배치’ 개념은 이처럼 내부와 외부, 그리고 부분과 전체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 차원을 사유하도록 합니다. ‘존재’나 ‘본질’, ‘구조’ 같은 것들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역동적 생성과 변이의 장으로서 세계를 보도록 하는 것이죠.

과학시간에 배웠던 ‘지층’의 모습을 떠올려볼까요? 지층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성’을 사유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시간’이나 ‘역사’라고 하면, 주로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시간만을 떠올리게 되는데 지층은 무생물에도 역사성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때 지층이 보여주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층층이 쌓여 있는 시간성입니다. 지층에서 과거-현재-미래는 비선형적인 인과성을 이루며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고, 단층이 형성되면 과거의 시간성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표면에 형성된 주름은 상이한 시간성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지층은 일종의 시공간 복합체입니다. 채운샘께서는 푸코적 의미의 ‘문서고’, 그리고 예술가들이 덧칠한 캔버스 같은 것들도 일종의 지층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절의 구분은 형식과 실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표현 사이에서 일어난다. 표현은 내용 못지않게 실체를 갖고 있으며, 내용은 표현 못지않게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분절이 때로는 분자와 그램분자에 대응하고 때로는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용과 표현이 때로는 그런 식으로 배분되고 때로는 다르게 배분되기 때문이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대응 관계도 일치 관계도 없으며 다만 서로 동형성을 전제할 뿐이다. 내용과 표현 사이의 구분은 항상 실재적이지만, 그 부분은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항이 이중분절에 앞서 미리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중분절이 각 지층에서 자신의 노선을 그려둔 도면에 따라 두 항을 분배하고 두 항의 실재적 구분을 구성한다.”(93~94)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지층은 ‘이중분절’에 의해 형성됩니다. 지층은 언제나 코드의 차원과 영토의 차원으로 이중분절됩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가 ‘지층’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령 단백질조차도 언제나 이중분절에 의해 형성됩니다. 질료들의 흐름을 내용적 실체로의 분절과 더불어 다른 것들과 접속가능하게끔 하는 표현(코드)의 차원의 형식을 부여받아야 단백질은 단백질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중분절을 겪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문화만 담론적 차원을 갖는 게 아닌 것이죠. 스피노자의 신이 사유 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연장 속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처럼 내용적 차원과 표현의 차원은 동일한 지층의 두 측면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어떤 인과도 일치나 대응의 관계도 없습니다. 내용과 표현이 별도의 독립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중분절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질학적 차원에서는 그런 구분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분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유기체의 형성에서입니다. 가령 DNA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코드는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진 인간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죠(물론 내용의 층위는 표현의 차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히 유기체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내용/표현의 구분은 인간의 문화적 지층을 다르게 보도록 합니다. 문화적 지층을, 인간적인 전제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적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죠. 자연/문명의 이분법이 아니라 끊임없는 지층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 지질학적 지층과 유기체적 지층과 문화적 지층을, 발전의 단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지층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 인간과 비인간의 지층들을 위계를 나누지 않고 사유하는 것.

들뢰즈-가타리는 내용/표현의 세트를 통해서 기표/기의라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개념쌍이나 상부구조/하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넘어가고자 합니다. 채운샘은 내용/표현의 개념이 지니는 시사점(?)을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 설명해주셨습니다. ‘감옥’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감옥’이라고 할 때 그 말이 꼭 ‘감옥’이라는 건물을 지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건물을 지시하기 위해 ‘감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거기에는 감옥이라는 건물들을 둘러싼 배치가 무의식적으로 함축되어 있겠죠.

푸코는 ‘감옥’이라는 독립적 실체를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원시사회로부터 현대사회까지 이어지는 감옥의 역사 같은 것은 푸코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푸코는 우선 감옥이라는 내용 형식이 학교, 공장, 병원, 군대와 같은 다른 내용의 형식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기능을 부여받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또 법학과 의학, 경제학 등의 앎의 차원에서 ‘범죄’라는 것이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이때 푸코는 언어와 지시대상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비역사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관점이나 모든 의미작용들을 기표로 환원시키는 관점, 인식이나 앎의 차원을 ‘하부구조’로 환원시키는 경제 중심적 관점을 모두 벗어나 내용(비담론적 차원)/표현(담론적 차원)의 이중분절 속에서 감옥을 둘러싼 지층, 그 배치를 탐사합니다. 그가 광기와 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언어와 사물, 정신과 신체, 문화와 자연 등등의 인간적 구분들을 넘어서 내용/표현의 이중분절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지층화되고 있는지를 보도록 하는 효용성을 갖습니다.
전체 2

  • 2019-07-06 12:41
    지층이 뭔지 잘 몰라도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렇게 치열하게 이루어진 걸 보면 왠지 감동적입니다. 당연해서 던지지도 않아도 될 것들을 이해하려는 순간 머리가 빙빙 도는 이 관성과도 싸워야 할 텐데 허허.

  • 2019-07-06 21:14
    바깥-이탈하는 힘으로서의 외부성. 지층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구조의 변용과 차이의 문제일까요? 지층이 사유하게 하는 '시간성'이라는 것을 니체가 말하는 비역사적인 것과 함께 생각해봐도 될까요? 왕그리 슝그리 어려워 어려워~ 내용/표현에 대해서도 다음에 더 설명해주세용. 후기를 기다리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