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달생 7~14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9-02-25 19:40
조회
66
저번 시간에도 우쌤이 말씀하셨지만, 〈달생〉편은 잘 사는 기술 혹은 삶의 달인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관윤이 말하는 지인의 경지라든가 매미를 잡는 노인, 배를 잘 운전하는 사공, 수영 잘 하는 사람 등등이 나옵니다. 특히 매미를 잡는 것 같은 경우에는 매미를 잡는 이유도 안 나오고, 훈련 내용도 딱히 매미 잡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이거나 실용적이라기보단 욕망을 부귀에서 양생으로 돌리기 위해선 기술을 쌓는 것과 같이, 일종의 수양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읽었을 때 다른 이야기들도 좀 엉뚱하거나 핀트가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도 부귀에 대한 욕망을 패러디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桓公田於澤管仲御見鬼焉公撫管仲之手曰:「仲父何見?」

對曰:「臣無所見。」公反誒詒為病數日不出

齊士有皇子告敖者曰:「公則自傷鬼惡能傷公夫忿滀之氣散而不反則為不足上而不下則使人善怒下而不上則使人善忘不上不下中身當心則為病。」

桓公曰:「然則有鬼乎?」

:「沈有履竈有髻戶內之煩壤雷霆處之東北方之下者倍阿鮭蠪躍之西北方之下者則泆陽處之水有罔象丘有峷山有夔野有彷徨澤有委蛇。」

公曰:「請問委蛇之狀何如?」

皇子曰:「委蛇其大如轂其長如轅紫衣而朱冠其為物也惡聞雷車之聲則捧其首而立見之者殆乎霸。」

桓公囅然而笑曰:「此寡人之所見者也。」於是正衣冠與之坐不終日而不知病之去也

()환공이 습지대에서 사냥을 하고, 관중이 수레를 몰고 있었다. 귀신을 보고는, 환공은 관중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중부께서도 무언가를 보셨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환공이 돌아가서는 가슴에 무언가 맺히고, 시름시름하다가 병이 들었고, 수일 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제나라 변사 중에 황자고오(皇子告敖)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말했다. “공께서는 스스로 다치게 한 것이지, 귀신이 어찌 공을 다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분노가 쌓이고 울결이 맺힌 기운이 흩어지고,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순환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운이 올라가고 내려오지 않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화를 잘 내게 하고, 기운이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으면 잘 까먹게 됩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가운데 심장에 머무르게 되면 병이 됩니다.”

환공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귀신이 있는가?”

황자고오가 말했다. “있습니다. 오물에는 리()가 살고, 부뚜막에는 조황신[]이 살고, 집안의 화장실에는 뇌정(雷霆)이 살고, 동북쪽 모퉁이에는 배아규롱(倍阿鮭蠪)이 뛰어다니고, 서북쪽 모퉁이에는 일양(泆陽)이 살고 있습니다. 말에는 망상(罔象)이 있고, 언덕에는 신()이 있고, 산에는 기()가 있고, 들판에는 방황(彷徨)이 있고, 늪지대에는 위사(委蛇)가 있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묻건대, ‘위사의 생김새는 어떠한가?”

황자가 말했다. “‘위사는 그 크기가 바퀴통만 하고, 길이는 끌채와 같으며, 자주색 옷을 입고, 붉은 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본성됨은 요란한 마차 소리를 듣는 것을 싫어하니, [그 소리가 들리면] 머리를 번쩍 들고 일어섭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패자에 가까워진다고 합니다.”

환공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내가 본 것이다.” 이에 의관을 바로하고, 황자와 같이 앉고서는 하루가 채 되지 않아서 병이 떠난 줄도 모르게 되었다.

《장자》에서 제환공은 주로 외물에 휘둘리는 속물적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이 이야기에서 환공은 황자고오의 진단을 듣기보단 귀신의 유무를 궁금해 합니다. 남의 말을 듣기보단 패자의 운명이란 자신이 듣고 싶었던 것을 듣자 병이 낫는 환공의 이미지가 포인트입니다.

택(澤)은 ‘습지대’인데, 수풀이 우거져서 경제적 가치가 높은 땅입니다.

무(撫)는 ‘어루만지다’라는 뜻으로, 귀신을 보고 놀란 환공이 관중의 손을 덥썩 잡는 것을 묘사하는 글자입니다.

분축지기(忿滀之氣)는 화기가 쌓여서 맺힌 상태를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사기(邪氣)라 돼있는데, 우쌤은 기가 고르지 않아서 순환되지 않는 상태라 하셨습니다.

 

9. 紀渻子為王養鬪雞十日而問:「雞已乎?」

:「未也方虛憍而恃氣。」

十日又問:「未也猶應嚮景。」

十日又問:「未也猶疾視而盛氣。」

十日又問:「幾矣雞雖有鳴者已無變矣望之似木雞矣其德全矣異雞無敢應者反走矣。」

기성자(紀渻子)가 왕을 위하여 투계(鬪雞)를 길렀다. 십일이 지난 뒤에 [왕이] 물어봤다. “닭은 준비되었소?”

기성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쓸데없이 교만하고 자기 기운을 믿고 있습니다.”

십일이 지난 뒤에 또 물어봤다. 기성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여전히 [다른 닭의] 소리와 그림자에 반응합니다.”

십일이 지난 뒤에 또 물어봤다. 기성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여전히 [다른 닭을] 흘겨보고, 자기 기운을 돋웁니다.”

십일이 지난 뒤에 또 물어봤다. 기성자가 말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비록 운다고 해도 거의 동요하지 않고, 그 닭을 보노라면 나무닭인 것만 같습니다. 그 덕()은 온전하여, [다른] 닭이 감히 응하지 않고 도리어 달아납니다.

기성자가 제나라 왕을 위해 무적의 싸움닭을 기른 이야기입니다. 우쌤은 대도시의 문화로 투견, 투계 같은 오락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질시(疾視)는 ‘째려보다’라는 뜻입니다.

목계(木鷄)는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닭을 말합니다. 제물론의 오상아(吾喪我)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 孔子觀於呂梁縣水三十仞流沫四十里黿鼉魚龞之所不能游也見一丈夫游之以為有苦而欲死也使弟子並流而拯之數百步而出被髮行歌而游於塘下

孔子從而問焉:「吾以子為鬼察子則人也請問蹈水有道乎?」

:「吾無道吾始乎故長乎性成乎命與齊俱入與汩偕出從水之道而不為私焉此吾所以蹈之也。」

孔子曰:「何謂始乎故長乎性成乎命?」

:「吾生於陵而安於陵故也長於水而安於水性也不知吾所以然而然命也。」

공자가 여량(呂梁)에서 폭포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폭포가 30길은 될 것 같았고, 일어난 포말이 40리는 퍼져나갔다. 자라, 악어, 물고기 모두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공자가 어떤 남자가 떠다니는 것을 봤는데, 고통이 있어 죽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자는] 제자로 하여금 나란히 쫓아가게 하여 그를 건져내었다. 수백 보[를 헤엄치고] 나와서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서는 제방 아래에서 놀았다.

공자가 따라가서 물었다. “나는 선생이 귀신인 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로군요. 묻건대, 물을 건너는 기술이 있습니까?”

남자가 말했다. “없습니다. 저는 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습관대로 헤엄치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저의 본성으로 자라났으며, 운명과 같은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소용돌이와 함께 들어가고, 솟는 물과 함께 나오니, 물의 길을 따라가지 사사로운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헤엄치는 방법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엇을 원래 태어난 곳에서 살아가듯 헤엄치기를 시작하고, 본성으로 자라나고, 운명으로 완성되었다고 합니까?”

남자가 말했다. “저는 육지에서 태어나 육지를 편하게 여기니, 원래 태어난 곳입니다. 물에서 자라나 물을 익숙하게 여기니, 본성입니다. 내가 그렇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니, 운명입니다.”

피발(被髮)은 ‘머리를 풀어헤치다’라는 뜻으로, 세상의 예의를 신경 쓰지 않는 방외자의 증거입니다.

수영 잘하는 남자의 핵심은 물의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것입니다.

고(故)는 원래 태어난 곳, 성(性)은 자란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형성된 기질, 명(命)은 개체인 나의 인식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자연 전체의 질서입니다.

 

11. 梓慶削木為鐻鐻成見者驚猶鬼神魯侯見而問焉:「子何術以為焉?」

對曰:「臣工人何術之有雖然有一焉臣將為鐻未嘗敢以耗氣也必齊以靜心齊三日而不敢懷慶賞爵祿齊五日不敢懷非譽巧拙齊七日輒然忘吾有四枝形體也當是時也無公朝其巧專而外骨消然後入山林觀天性形軀至矣然後成見鐻然後加手焉不然則已則以天合天器之所以疑神者其是與?」

재경(梓慶)이 나무를 깎아 악기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악기걸이가 완성되자, 본 사람들이 귀신을 본 것처럼 깜짝 놀랐다. 노나라 제후가 보고서 물었다. “그대는 어떤 술()로 그리했는가?”

재경이 대답했다. “신은 장인이니, 어떤 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저는 악기걸이를 만들려 할 때, 절대로 기()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재계하여 마음을 안정되게 만듭니다. 3일을 재계하면 상과 벼슬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고, 5일을 재계하면 외부의 평가를 바라지 않게 되고, 7일을 재계하면 갑자기 저의 사지와 형체를 잊게 됩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속세의 정치도 없게 되고, 기술에 전념하여 바깥의 시끄러운 것들이 사라집니다. 그런 후에야 우거진 살에 들어가, [나무의] 천성(天性)을 봅니다. [훌륭한] 형체의 나무에 이른 연후에는 완성된 악기걸이에 대한 상상을 이루고, 그런 후에야 재목에 손을 댑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만둡니다. 나의 본성으로 나무의 본성에 합치하니, 귀신인 것 같다고 의심한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재경은 악기걸이를 만드는 장인으로서 〈천도〉 마지막에 나온 윤편과 비슷합니다. 공(公), 조(朝)와 같은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재경이 관에 소속된 기술자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옛날에 관에 소속된 기술자들이 일류장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재경이 재계를 거듭할수록 변하는 지점이 포인트입니다.

천성(天性)이 나오는데, 재경 자신의 본성으로 볼 수도 있고, 재경이 다듬을 나무의 본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의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예술입니다.

기(器)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도덕경》 28장 “통나무가 흩어져서 그릇을 만든다(樸散則為器)”는 구절과 연결됩니다.

 

12. 東野稷以御見莊公進退中繩左右旋中規莊公以為文弗過也使之鉤百而反

顏闔遇之入見曰:「稷之馬將敗。」

公密而不應少焉果敗而反公曰:「子何以知之?」

:「其馬力竭矣而猶求焉故曰敗。」

동야직(東野稷)이 말을 부리는 것으로 노() 장공을 만났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먹줄이 친 듯 반듯했고, 왼쪽,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그림쇠처럼 정확했다. 장공도 이보다 뛰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갈고리처럼 100번 돈 뒤에 돌아오게 했다.

안합이 우연히 마주쳤는데, 들어가서 말했다. “동야직이 탄 말은 쓰러질 것입니다.”

장공은 묵묵히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과연 말이 쓰러져서 돌아왔다. 장공이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이를 알았는가?”

안합이 말했다. “그 말의 힘이 다했는데도 여전히 말에게서 달리기를 구하니, 그러므로 쓰러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13. 工倕旋而蓋規矩指與物化而不以心稽故其靈臺一而不桎忘足履之適也忘要帶之適也知忘是非心之適也不內變不外從事會之適也始乎適而未嘗不適者忘適之適也

공수(工倕)가 도면을 그릴 때는 곱자와 마름쇠를 덮은 듯했고, 손가락이 사물과 함께 변화하므로 마음에 쌓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영험한 마음이 전일하여 막힘이 없었다. 발을 잊는 것은 걷는 것이 알맞기 때문이요, 허리를 잊는 것은 띠를 매는 것이 알맞기 때문이고,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알맞기 때문이며, 내면이 흔들리지 않고, 외부에 좌우되지 않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기 때문이다. 알맞은 데서 시작하여 알맞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음은 알맞은 것의 알맞은 것까지 잊은 것이다.

백락(伯樂)이 말을 잘 모는 사람의 별명이듯, 공수(工倕)는 최고 기술자에게 붙는 이름입니다. 여기서는 망(忘)이란 단어가 ‘딱 맞다’, ‘편안하다’, ‘적합하다’라는 뜻의 적(適)과 같이 나오는 게 포인트입니다.

시호적(始乎適)은 ‘처음부터 삶의 목적인 適’으로 해석하거나 ‘始로 돌아간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해석을 따랐습니다.

 

14. 有孫休者踵門而詫子扁慶子曰:「休居鄉不見謂不修臨難不見謂不勇然而田原不遇歲事君不遇世賓於鄉里逐於州部則胡罪乎天哉休惡遇此命也?」

扁子曰:「子獨不聞夫至人之自行邪忘其肝膽遺其耳目芒然彷徨乎塵垢之外逍遙乎無事之業是謂 為而不恃長而不宰』。今汝飾知以驚愚修身以明汙昭昭乎若揭日月而行也汝得全而形軀具而九竅無中道夭於聾盲跛蹇而比於人數亦幸矣又何暇乎天之怨哉子往矣!」

손휴(孫休)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편경자(扁慶子)의 집으로 수시로 가서 말했다. “제가() 고향에 있을 때 수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어려운 일 앞에서는 용감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농사를 지으면 풍년을 만나지 못하고, 군추를 섬겨도 [능력을 인정받는] 세상을 보지 못하며, 고향에서는 쫓겨나고, 큰 도시에서는 배척되었습니다. 하늘에 어떤 죄를 지은 것일까요? 제가 어찌 이런 명을 만나게 된 걸까요?”

편경자가 말했다. “그대는 아직도 지인(至人)이 자연스레 행동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요? 간과 쓸개를 잊고, 감각기관을 놓으면, 망연히 세속 밖에서 방황하고, 하는 일 없는 것 가운데 거닐게 되니, 이를 일러 하면서도 거기에 의지하지 않고, 순환시키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그대는 지식을 꾸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몸을 닦음으로써 더러운 것을 드러나게 하고, 해와 달을 내건 듯이 밝게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당신의 몸을 온전하게 하고, 당신의 아홉 구멍을 갖추게 하며, 도중에 귀머거리나 장님, 절름발이, 절뚝이로 상처 입지 않고 그 사람 수에 포함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또한 다행입니다. 또 어찌하여 하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대는 돌아가십시오!”

종문(踵門)은 ‘걸어가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종(踵)을 ‘수시로’로 보기도 합니다.

세(歲)는 ‘풍년’, ‘흉년’ 둘 다 뜻합니다.

자행(自行)은 자연스레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망연방황호진구지외, 소요호무사지업(芒然彷徨乎塵垢之外,逍遙乎無事之業)은 내편 〈대종사〉를 비롯하여 여러 번 반복된 구절입니다. 위이불시, 장이부재(為而不恃,長而不宰)는 《도덕경》 51장, 77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인수(人數)는 ‘멀쩡한 사람으로 세다’라는 표현입니다.

 

孫子出扁子入, 坐有間仰天而歎

弟子問曰:「先生何為歎乎?」

扁子曰:「向者休來吾告之以至人之德吾恐其驚而遂至於惑也。」

弟子曰:「不然孫子之所言是邪先生之所言非邪非固不能惑是孫子所言非邪先生所言是邪彼固惑而來矣又奚罪焉?」

손자가 나갔다. 편경자가 들어와 앉았는데, 잠시 뒤에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어찌하여 탄식하십니까?”

편경자가 말했다. “좀전에 손휴가 와서 내가 그에게 지인의 덕()을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미혹됨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손자가 말한 것이 옳고, 선생님이 말한 것이 틀렸다면, 진실로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손자가 말한 것이 틀리고, 선생님이 말한 것이 옳다면, 그는 진실로 미혹되어 왔던 것이니, 또 어찌 죄를 지었다고 하십니까?”

 

扁子曰:「不然昔者有鳥止於魯郊魯君說之為具太牢以饗之奏九韶以樂之鳥乃始憂悲眩視不敢飲食此之謂以己養養鳥也若夫以鳥養養鳥者宜棲之深林浮之江湖食之以委蛇則平陸而已矣今休款啟寡聞之民也吾告以至人之德譬之若載鼷以車馬樂鴳以鐘鼓也彼又奚能無驚乎哉?」

편경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예전에 노나라 교외에 머무른 새가 있었는데, 노나라 군주가 그것을 기뻐했다. 그 새를 위해 태뢰 제사를 누리게 하고, 구소(九韶) 음악으로 기쁘게 했다. 새는 처음부터 근심하고, 슬프고, 어지러워하며 놀란 눈으로 감히 마시거나 먹지 못했다. 이것을 일러 자기를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길렀다고 한다. 만약 새를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기르려 했다면, 마땅히 깊은 숲에 집을 짓고, 강과 호수에 떠다니게 하고, 뱀을 먹게 하여 땅에서 평안하게 할 뿐이다. 지금 손휴는 작은 구멍을 열고 들은 바가 적은 사람인데, 나는 그에게 지인의 덕을 알려주었으니, 비유하자면 다람쥐를 수레나 말에 태우고, 작은 새를 종과 북으로써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손휴가] 또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이야기는 〈지락〉편과 중복됩니다. 핵심은 자신을 기르는 것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에, 새를 죽였다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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