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전

시의 맛 시즌 1 시경 5강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7-23 21:43
조회
116
굴원과 초사를 들어보셨는지!? 전 굴원이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그걸 초사라하더라~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경이 예상 외로 너무 재밌었던 것처럼, 초사도 어떤 말로 저의 가슴을 뒤흔들지 너무 기대됩니다. 날이 너무 더우니 오시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같이 이 기쁨을 나눠요~ 얼른 수요일이 되었으면!

 

1. 초사의 탄생 

초사(楚辭)는 초나라에서 불린 특정한 형식(辭)의 노래를 말합니다. 시경이 작자 미상의 작품집이었던 것과 달리, 초사는 누가 지었는지 작가의 이름이 거의 다 나옵니다. 주희가 정리한 《초사집주》에 따르면, 권1부터 권5까지는 굴원, 권6과 권7은 송옥, 권8은 가의와 회남소산의 작품입니다. 초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스타일은 굴원과 그의 제자로 추정되는 송옥으로부터 유래됐는데, 이때까지는 초사도 일종의 초나라 노래 정도로 인식됐습니다. 본격적으로 ‘초사’가 하나의 장르로 정의된 것은 한나라 때부터입니다. 《열녀전》을 지은 유향이 처음으로 초나라 노래를 의미하던 ‘초사’를 책 제목으로 정함으로써 하나의 스타일로 정의된 것이죠. 그런데 나중에 시경의 시들이 한 글자가 더해지면서 한부(漢賦)라는 다른 형식으로 변한 것처럼, 초사도 한 글자가 더 붙으면서 칠언시(七言詩)라는 장르로 변했고, 시에 담겨있는 기본적인 정서도 달라지게 됩니다.

우쌤은 초사에서 초(楚)와 사(辭)를 분리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초사란 초나라 지역에서 불린 사(辭)인데, 여기서 ‘사’란 일종의 무가(巫歌), 신이나 죽은 영혼, 신의 대행자인 왕에게 바치는 전문적 형식을 가진 노래입니다. 제사(祭辭), 축사(祝辭), 조사(弔辭), 고사(告辭) 그리고 《주역》의 괘사(卦辭), 효사(爻辭)에 모두 사(辭)가 들어갔듯이, ‘사’는 기본적으로 신어(神語)와 관련된 글자입니다. ‘사’가 본격적으로 보편적 문장이나 글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한나라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밖에 초사의 다른 특징은 혜(兮), 사(些), 지(只)와 같은 어조사를 사용하고, 문장 끝에 난왈(亂曰)이란 말로 정리한다는 형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초나라 지역에서 구전되어온 민요는 초가(楚歌)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항우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부른 해하가(垓河歌)나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뒤에 부른 대풍가(大風歌) 같은 것들이 초가에 해당됩니다.

시경에서 시를 주제별로 구분할 때 치세지음(治世之音), 난세지음(亂世之音), 망국지음(亡國之音)으로 나눴습니다. 이러한 주제에 따라 초사를 보면, 대부분이 난세지음이거나 망국지음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지배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초나라의 정치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굴원과 초회왕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초나라는 초위왕 때 국력을 어느 정도 키워놨는데 초회왕이 제위에 오르면서 나라가 개판이 됩니다. 크게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일명 600리 사기 사건입니다. 진(秦)혜왕과 장의가 제나라와의 합종을 깨면 600리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믿은 초회왕이 합종을 깼으나 600리가 아닌 6리만 받게 됩니다. 이에 화가 난 초회왕은 진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나 크게 패하면서 많은 땅을 뺏기게 됩니다. 두 번째는 초회왕 유괴 사건입니다. 초회왕 30년에 진(秦)소왕이 자신과 맹약을 맺기 위해 초회왕을 초대했다가 그대로 죽을 때까지 유괴해버린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초나라는 친제파와 친진파로 나뉘어서 계속 싸웁니다. 굴원은 친제파였고, 초회왕의 아들이자 경양왕(초회왕의 아들)의 동생이었던 자란은 영윤이라는 최고의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친진파였습니다. 굴원은 두 번의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넌지시 시를 써서 풍자하거나 자란에게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상소문을 쓰는 등 참언을 일삼다가 두 번이나 유배를 가게 됩니다. 처음 유배를 가게 됐을 때(기원전 305년)는 초회왕에게 참언을 했으나 오히려 간신들에 의해 쫓겨난 자신의 처지를 비통해하며 〈이소〉를 지었고, 두 번째 유배를 갔을 때는 진(秦)의 장수 백기에 의해 수도인 영도가 함락되는 것(기원전 278년)에 절망하며 돌을 안고 멱라강에 뛰어들어 자살합니다. 그러니까 어지러운 정세와 임금에 대한 충절로 가득했던 굴원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 역시 그런 정서들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2. 초사와 굴원에 대한 여러 해석 

사실 굴원의 삶을 우수(憂愁), 분만(憤懣), 충절(忠節)로 해석한 것은 주희입니다. 금고형이라는 공부 금지 + 제자 육성 금지 명령을 받은 주희가 자신의 처지와 굴원의 처지가 비슷하게 느낀 것이죠. 주희는 자신이 편찬한 《초사집주》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굴원의 사람됨은 그 지행이 비록 중용을 넘어섰으나 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충군애국지성심(忠君愛國之誠心)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사지(辭旨)가 비록 질탕(跌宕괴신(怪神원대(怨懟격발(激發)에서 나와서 가르침으로 삼을 수 없으나 모두 견권(繾綣측달(惻怛)하여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지극한 뜻(不能自已之旨意)에서 나온 것이다.”

주희의 입장에서 초나라는 공자의 배움이 전해지지 않은 야만인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를 따라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굴원의 시에 담긴 충절은 선한 본성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주희 외에도 곽말약(1892~1978)이란 사람은 굴원의 스토리를 더 극적으로 만듭니다. 《사기》 〈굴원가의열전〉에 따르면, 굴원의 죽음은 초나라의 수도 영도가 함락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멱라강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곽말약은 송옥과 선연이라는 새로운 여제자를 등장시켜서 굴원의 죽음을 다르게 그려냅니다. 송옥은 남아있는 자료가 적어서 원래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굴원이 쫓겨난 이후인 경양왕 때 대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굴원을 배신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죠. 그리고 선연은 당시 여성 해방이라는 혁명의 테마가 반영되어 등장한 인물입니다. 곽말약은 송옥이 자란과 결탁해서 굴원이 독을 먹고 죽을 뻔했으나 선연이 대신 변장하고 독을 마심으로써 스승을 구하고 죽었다는 스토리를 만든 것이죠.

순서가 이상하지만, ㅎ;; 사마천은 초사가 비(悲)라는 감정이 관통한다고 말합니다. 이 ‘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앞으로 작품을 읽으면서 좀 더 따져보죠! 그리고 사마천의 또 다른 특징은 굴원과 가생을 하나의 열전으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진 지 100년 후 가생이란 사람이 그곳을 지나며 글을 지어 던지며 조문했다고 하죠. 굴원이 초회왕을 만난 것처럼, 가생도 효문제를 만나고 효문제의 막내아들인 양회왕의 스승이 됩니다. 하지만 양회왕이 말을 타다 낙사하면서 가생도 애도하는 마음이 깊어져 죽었다고 하죠. 사마천은 이런 가생이 지은 〈복조부〉를 통해 굴원을 다시 보게 됐다고 얘기합니다. 사마천이 보기에 굴원은 궁형을 받아 사회적으로 매장된 자신과 달리 다른 나라로 유세를 떠나 잘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굴원은 멱라강에 투신했죠. 여기서 사마천은 처음에 그가 왜 죽었는지, 혹시 현실도피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복조부〉를 읽은 뒤에 굴원이 중요시한 것은 품은 뜻(志)이었지 사생이나 인생의 성패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마천의 발분저서(發憤著書) 느낌이 솔솔 나는데 요것도 좀 더 읽고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부사〉 얘기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쌤은 〈어부사〉에 등장하는 어부와 굴원이 모두 현실 속 굴원의 내면의 목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멱라강을 눈앞에 두고 굴원 자신도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어부의 입장은 세상이 탁하면 탁한 대로 같이 탁한 채로 살면 되는데, 굳이 맑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굴원의 입장은 자신의 결백함을 스스로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굴원이 결국 자살한 것은 어부가 아닌 이야기 속 자신의 입장을 고른 결과겠죠. 다만 이때 굴원의 마음이 사마천의 분(憤)이었는지 아니면 한(恨)이었을지 생각하게 되네요.

《맹자》 〈이루 상〉에서는 《어부사》의 굴원의 입장을 단장취의해서 공부의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굴원이 세상을 탁한 물에 비유한 것과 달리, 맹자는 자신을 물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닦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이 와서 발을 씻을 정도로 우습게 여긴다는 말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다는 유가의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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