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9.12(3-7주) 주역글쓰기 후기

작성자
만화
작성일
2021-09-25 23:20
조회
143
추석연휴 전에 후기를 올리겠노라 장담했는데 벌써 추석연휴도 끝나고 수업이 코앞이네요. 올해 목표 중 가장 큰 목표가 ‘벼락치기 안하기’였는데 3개월 안에 이 습관을 버릴 수는 있을까요? 부디 버릴 수 있게 해주세요... 휘영청 밝은 달에 빌어봅니다. 달을 보니 지난 수업에 채운선생님께서 제가 너무 눈에 보이는 상에만 집착해서 다른 의미의 변주를 읽어내지 못한다고 지적해 주신 게 생각납니다.‘견지망월’의 상황 같습니다. 주역의 참뜻은 읽어내지 못하고 괘사, 효사의 이미지만 머릿속에 그리려 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셨는지 제가 허우적대는 지점을 콕 짚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괘는 연속선상의 흐름이 아니다 : 그래서 선후차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괘는 건곤을 시작으로 순서를 갖고 배열된 연속선상의 흐름이 아니며, 서괘전은 단지 그 시대의 괘 배열 담론일 뿐, 주역의 순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64괘는 태극, 무극이라는 하나에서 출발했다 : 괘는 하나가 외따로 떨어져 나온 게 아닙니다. 보이는 괘 이면의 보이지 않는 괘까지 읽을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의 괘와 나머지 63괘와의 관계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나타난 하나의 생각자체가 다른 생각으로 가는 하나의 잠재성일 수 있습니다. 괘는 드러난 하나의 시츄에이션이며 이 드러난 하나의 시츄에이션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함축하는데 주역은 그것까지 같이 볼 수 있어야한고 합니다. 그래서 변효와 착종의 관계를 공부해야 하나 봅니다.

음과양, 동과정이 하나의 고정된 대립상태가 아니다 : 음양, 동정은 일련의 과정 속 서로의 전환태이듯, 어떤 상황이 극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흐르는, 그러한 변화과정중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위기라 해도 모든 위기, 모든 한계는 다른 말로 하면 또 다른 상황으로 가는 임계점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읽어내느냐, 아님 우리를 빼도 박도 못하게 하는 어떤 결정적 조건을 한계라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한계는 막다른 길일 수도, 가능성으로 가는 전환점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지만이 아닌 시대에 맞는 개념적 언어틀을 발명해야한다 : 정이천 시대에는 그 시대의 남녀, 음양, 동정, 상하 등을 규정하는 언어적 틀이 있듯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언어적 틀을 발명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전시대의 언어적 틀은 참고만 할 뿐, 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는 매번 발이 묶임을 느낍니다. 달을 보지 못하고 시선이 손가락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저를 봅니다. 때를 읽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선생님께서 때를 읽는다는 건 마음의 장을 읽어내고 그런 사회의 배치를 읽어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옛날에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자들이 우주의 몇몇 천상과 산 구름 물을 보고 때를 읽었지만 지금은 너무 복잡해진 세상, 그러니 그 모든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분석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 스스로 답을 구하는 것이 공부이며, 공부를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하셨습니다. 자기 삶에 밀착시켜 질문하고,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괘가 좋다고 효가 다 좋은 건 아니다 : 괘가 N분의 1의 지분을 갖거나 효들이 6분의 1의 개체 값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효는 각자의 위치 값과 다른 효들과 관계 속에서 괘의 일부로 작동하지만 괘에 전적으로 따르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개체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지만 개체와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듯이 말입니다. 큰 틀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범주 안에서 개개인이 갖게 되는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고 구조화되는지를 보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불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본의 옴진리교의 언더그라운드 테러와 관련지어 설명해 주셨는데요, 개개인의 과로사가 만연하며 비관적 사유가 팽배했던 그 때의 일본이 아이러니 하게도 경제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대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 우리나라, 그리고 개체와 사회의 욕망과 현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때, 즉 시공간의 배치를 보는 것이고, 괘와 효를 시대에 맞게 해석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천태

지천태괘는 소통이 좋은괘 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구이효를 중심으로 태괘의 시절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도 4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九二,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 得尙于中行

더러운 것 포용하고 - 다양하고 이질적인 걸 받아들이라.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고 - 안정적일 때 오히려 도전하고 모험할 수 있는 용기.

먼 것을 버리지 않고 - 소외된 자들, 소원했던 관계를 되돌아보라.

파벌을 만들지 않고 - 세를 가졌을 때에 배재와 차별을 경계하라.

지천태괘의 구이효는 안정된 시기에 뭐에 힘써야하는지를 일깨우는 구절이라 하셨는데요. 마치 추석처럼 풍요롭고 넉넉한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중산간

중산간(重山艮) 괘사에

등에서 멈추면(艮其背) 몸을 얻지 못하며(不獲其身),

뜰에 가서도(行其庭) 사람을 보지 못하여(不見其人), 허물이 없을 것이다.”

괘사 간기배(艮其背)의 등에서 멈춘다는 것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빌헬름의 감각기관을 수호 한다는 해석을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등은 척추가 있는 곳이며, 척추에는 신경계가 뻗어 나오는 척수가 있습니다. 즉, 감각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든 감각신경이 모인 이곳에서 멈춘다는 것은 외부로 향하는 감각을 거두는 것입니다. 감각이란 외부와의 접속으로 생겨나며, 감각으로부터 인간의 에고, 자의식이 생겨납니다. 선생님께서는 에고란 외부와의 접속에서 일정한 규정성에 휘둘릴 때 생겨나는 것이라 하십니다. 자기 내면에 생겨나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세트, 판단잣대인 것이지요. 그래서 외부로 향하는 감각과 판단들이 자의식을 만들어 내며, 외부와의 접촉이 없다면 자의식도 생기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순수한 자의식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헬름의 감각기관을 수호 한다는 것, 감각이 외물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는 ‘군자의 삶, 자기의 사유를 통해 자기척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간괘가 그런 과정에서 멈춘다는 게 단전에서 시지즉지라 풀이하며 때에 맞게 처신하고 멈추고 그친다는 의미이지요. 정이천 처럼 해석하든 빌헬름처럼 해석하든 외물에 휘둘리는 감각을 수호하고 자기 자신의 에고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그것이 상전에서 말하는 시지즉지 시행즉행(時止則止 時行則行)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간괘의 지(止)의 의미에 대해 저희 조에서 토론하며 언급한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 대해 선생님께서 부연하셨습니다. 주체해석학의 영어 컨버트라는 동사, 개심, 전향이라는 종교적 용어로 많이 쓰이는 단어를, 동굴 속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을 그치고 일어나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는 자로 설명하시며, 일종의 지식의 메시아 같은, 몸을 돌려 진리를 구하러 밖으로 향하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지의 의미를 전향이라는 의미로 연결한다면, 헬레니즘 시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변형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일련의 훈련과 수련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조형하는 메시아, 선각자의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조형하려는 부단한 결단과 노력. 그 결단과 노력의 계기이자 유지시키는 동력이 타자라 말씀하십니다. 스승과 벗, 타자 속에서 내가 변형될 수 있게 촉발해주는 다른 관계성이 생겨난다 하셨습니다. 서로 촉발하고 이끌 수 있는 관계, 자기와 타자들과 다른 관계 맺기를 하려는 결단과 노력. 이게 지(止)라고 말씀하십니다.

간괘의 마지막 상구효의 설명에서는 독실하게 멈추는 것, 세상의 일은 끝까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자기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산지박

박괘에서는 상구효의(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석과(碩果)에 대해 말씀하시며, 니체를 인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얻고자 하는 게 열매라 하지만 진짜 나무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씨앗이라고 말입니다. 열매는 먹고 나면 사라지듯, 후손에 남길 씨앗을 생각하지 않고 부를 남겨주면 언젠가 바닥이 나고 말 것입니다. 일생에 과일이 목표인 자와 씨앗이 목표인 자는 다릅니다. 물질적 유산은 씨앗이 아닙니다. 지적유산은 닳지 않습니다. 공자의 2500~3000년 지난 얘기들이 씨앗이 되어 그것으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은 석과가 아닌 씨앗입니다. 또 니체의 단편 ‘동산과 부동산’이야기도 해주시며 다 뺏기고 나서도 대지주의 품격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건 동산이 아닌 부동산이라고 하십니다. 진정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아는 자는 대지주의 품격을 갖고 살아 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번 수업은 곤지 선생님의 ‘추석맞이 낭송대잔치’로 수업을 마무리 했습니다. 낭송에 완벽히 성공하신 곤지선생님께서 비로소 갖게 되신 씨앗이자 부동산을 몹시 부럽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잔치의 하이라이트 선물 추첨의 수혜를 입게 되어 무척 영광이며, 인생 최고의 책을 선물 받게 된 것에 대해 무한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제가 시집에 이렇게 열광하게 될 줄 정말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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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8 20:21
    단식과 단술 같은 후기가 강의에 이어 마음을 다시 울립니다.
    64괘는 욕심으로 외웠지만, 시론집만은 누군가의 맘에 가닿기를 바랬는데 기쁘네요.
    때로는 욕심도 징검다리의 돌 하나 택은 하는것 같습니다.

    • 2021-10-04 21:09
      욕심도 징검다리의 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저 같은 소인도 군자 하나 만드는 데 발판이 되길 기대해도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