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10.11 혜원조 <샤나메>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10-14 20:11
조회
114
샤나메 후기

1. 선과 악

샤나메의 주제는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선과 악은 우리가 아는 '선을 따르고 악을 물리친다'는 구도 속에서의 선악이 아닙니다. 가령 <샤나메>에서 악은 진보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악의 힘으로 인간은 문자를 발명하기도 하고 도시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기다 악이 왕에게 속삭이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왕에게 파고들어 나라간의 분란을 만드는데, 그 분란은 결과적으로 이란의 세력이 더 커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구도에서 악은 단지 선의 부재였습니다. 하지만 <샤나메>에서 악은 흩어진 힘을 응결시키고,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오만'이라는 악의 형태 역시, 좋은 말, 문자, 계급, 불 따위로 응결됩니다. 무엇보다 악은 이란의 이웃나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악은 단지 없애야 하거나, 결여 상태가 아니라 선의 이웃, 물리쳐야 하면서도 완전히 배척할 수 없는 선의 이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조로아스터교적 세계관과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조로아스터에서는 단지 선이 이기고 악이 패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계속되는 선과 악의 공존이고 인간은 거기서 선택할 뿐이라고(엘리아데)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말하지요. 그런 교의가 <샤나메>의 선악구도에도 반영된 것 같습니다.

2. 신화와 역사

많이 나온 질문 중 하나는 샤나메는 역사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역사와 신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나왔습니다. 우선 <샤나메>는 우리가 아는 역사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온갖 동물과 인간이 소통하고 신과 악마가 나오는 등 신화적 요소가 만연하니까요. 그리고 한 왕이 몇백 년을 다스린다거나, 아리만이 입을 맞추자 어깨에서 뱀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도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상적인 장면에서도 우리는 몇몇 역사적인 지점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새와 암소를 숭상하는 신앙이 존재했다든가, 뱀을 숭상하여 인신공양을 하던 국가의 왕이 있었는데, 그것이 새로운 세력에 밀려 제거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화는 단순히 '역사가 있기 이전의 유치한 이야기'로 치부할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논문을 참고하면 이란의 시간관을 고려한 역사서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논문에서는 '복수'를 계기로 시간의 순환과 쇄신이 반복되는 패턴을 <샤나메>는 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샤나메>에서는 계속해서 옳은 방향,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간관이 아닌, 선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왕이 몇백 년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순환과 반복이 중요하다면 누가 몇년을 다스렸는지, 그래서 지금은 처음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굳이 셀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3. 영웅

영웅 루스템은 <샤나메>의 주인공처럼 나옵니다. 하지만 논문은 엄연히 '왕의 책'으로서의 <샤나메>를 조명하지요. 영웅이 아무리 각광받고 활약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샤나메>는 왕의 선에서 악으로, 그리고 다시 선을 회복하는 동선을 일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쪼다 같은(!) 카이 카우스도 사실은 <샤나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루스템은 아무리 활약한다고 해도 결국 <샤나메>에서는 중심에서 비껴나 있습니다. 이런 영웅의 위치가 재밌는 것 같습니다. 루스템은 1.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힘이 세고 2. 이란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들의 편을 들지만 3. 요청이 들어오더라도 그는 자유민으로서 도울지 돕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루스템은 중앙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선(이란)의 요청을 스스로 선택하는 캐릭터로 나타납니다. 이런 탈중심성과 선택의 자유, 이것이 루스템의 영웅성이지 않을까요?

4. 운명과 비극

루스템의 운명은 기구하고,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식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어이 없게도 전사 다운 죽음이 아닌 함정에 빠져 죽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비극적인 장면을 그리스의 비극성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가령 아킬레우스가 거의 발 끝까지 스틱스강에 몸을 담그고도 피할 수 없었던 죽음처럼 말입니다. <일리아스>를 읽어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요.
하지만 한편 그리스 비극은 루스템의 비극성과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령 오이디푸스의 비극성은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등이 아니라, 그런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결국 그 여정이 운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되니까요. 루스템의 아들 살해나 죽음에 그런 아이러니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죠. 오히려 인간이 반드시 그의 능력과 비례하는 최후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그리스인은 인간이 신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장난감 같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상정했지만 <샤나메>에는 그런 비극적이고 자조적인 발랄함은 보이지 않는 것 같고요. 이런 운명에 대한 정서는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좀 더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전체 3

  • 2018-10-15 12:52
    저도 루스템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모두를 복종시키던 그의 능력과 자존심도요. 하지만 그도 온갖 불확실한 사건 속을 유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다른 시공간 속의 영웅들과 비교해보는 것, 재미있을 것 같아요! @.@

  • 2018-10-15 12:59
    영웅과 고통? 복수? 말로만 듣던 일리아스와 비교해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얘기들을 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

  • 2018-10-16 10:19
    탈중심성과 선택의 자유?? 영웅 얘기를 더 풀어주시면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