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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의식과 본질> 강의 2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8-14 00:26
조회
63
<의식과 본질>에서는 심층의식을 문제삼는다. 사유를 했을 때 표층의식이 전부라고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우리는 프로이트를 알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꿈은 시공간이 전혀 분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심층의식과 표층의식의 관계는 뭘까. 우리의 의식활동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내가 보는 것이 전부일까? 나는 규정된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규정하는 나 자신의 의식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나쁘다라고 판단하는 나의 의식은 세계상과 일치하는가? 의식이 세계인가?


본질

우리는 일반적으로 현상과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하는 것이 따로 있는가? 아니면 드러난 것이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과 관계 있는 것인가? 꽃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 다른데 계속 다른 것을 꽃이라고 할 수 있나? 계속 명명되는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아야 하나? 그럼 피어났다/시들었다 하는 것은 무엇을 규정하는가? 현상은 규정하는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다는 문제는 뭘 인식하는가이다. 그런데 현상이란 우리의 인식인가? 우리가 보는 '꽃'이란 말은 지시하는 게 있나? 펜을 지시할 때도. 각각 다른 역사를 지닌 펜을 모두 '펜'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의식과 본질을 다룬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세계와 관계하는가를 다루는 것.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은 세계를 어떻게 출현시키는가의 문제.

알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게 실재하는 것. 그렇다면 '있다'는 건 뭔가. 그럼 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뭘로 증명하나? 그런데 알라를 믿는 사람들은 신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럼 실재한다는 건 뭐가 실재한다는 거지?

게임 세계에 빠져서 몇시간이고 게임을 할 때 그게 없다고 생각하면 게임이 되나? 그건 실재하는 세계. 크로넨버그. <이그지스텐스>. 사람들이 usb를 꽂고 완전히 다른 실제 속에 있게 되는 상황을 그림. 그럼 시뮬레이션은 가짜이고 그렇지 않은 건 가짜라고 하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도대체 실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생생하게 느낀다. 그럼 드라마는 실재하지 않다고 하는가? 그렇게 감정을 실재적으로 생산하는데? 이때 허구와 실재는 어떻게 가르는가?

그럼 도대체 실재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뭘 실재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세계에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떻게 관계 맺는 관계인가? 애들하고 대화가 안 통하는 경우. 혹은 나이 차이가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면 대화가 안 통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함.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실재 세계가 다른 것. 가령 '가난'에 대해 각 세대가 떠올리는 실제성이 다름. 우리는 가난이라는 말로 뭘 포착하는가? 가난이라는 말이 대응하는 세계는 각각 다르다. 여성/남성 다 마찬가지.

그럼 도대체 우리의 의식은 이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고 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 현상이란 세계 자체인가? 세계 자체는 따로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철학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 이런 고민을 해야 다른 세계를 만날 때 상대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음. '우리는 서로 달라~'는 아무런 배움이 발생하지 않음. 저들에게 신은 어떻게 세계와 관계하게 하는가? 자본이라는 것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는 방식과 공에 대한 투철한 깨달음에 입각해 자기 삶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름. 이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것을 믿으면 선하고 어떤 것을 믿으면 악하기 때문에 아니라 우리는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감. 삶의 문제란 인식의 문제와 달라지지 않는다.

니체: 인식과 도덕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따로 있지 않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의식과 본질의 문제. 우리는 어떻게 세계와 관련맺는가의 문제. 세계와 관련맺는 방식 자체가 그것을 규정하고 또 의식을 출현시킴. 이 인식의 문제를 넘어가지 않고서 왜 각각 상이한 문제가 발생하는지.


이슬람과 자본

나카자와 신이치의 <녹색 자본론>. 이슬람에서 화폐를 사유하는 방식과 기독교에서 화폐를 사유하는 방식이 다른가? 이는 <대칭성 인류학>에 잠깐 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왜 자본주의가 기독교하고 결합할 수 있었을까? 기독교는 자기증식을 하는 삼위일체를 만들어냄. 성부, 성자, 성령. 성부와 성자라고 하는 이 구도가 영에 의해 삼위일체를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성부와 성자 사이를 도는 매커니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왜 하필 부자관계인가? 아버지는 법이기도 하고 근원적인 자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원초적 자본으로부터 이윤이 불어나는 증식의 방식. 그런데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이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 자본주의란 자본을 기초라고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하든 자본이 있어야 거기서 생산한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는 자본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초기자본 자체가 아버지. 자기증식. 아버지가 아들을 낳듯 자기증식의 끊임없는 운동. 삼위일체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나 사고방식이 자본의 움직이는 방식과 동형적.

이슬람과 동양에는 자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 상인들의 세계인 이슬람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았나? 그들이 세계를 스토리하는 방식이 자본주의와 같지 않았다. 경제문제는 보다 낙후된 경제시스템과 합리적 경제시스템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게 아님.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이자를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는 자본주의가 이해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이해되려면 이자가 이해되어야 한다. 왜 '하느님 아버지'인가? 왜 '어머니'가 아니라? 절대불변의 하느님으로부터 나머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예수의 탄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과 예수 고리에 대해 부채를 진 자가 된다. 부채개념, 이자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인드가 성립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도입되지 않음. 경제는 경제대로 움직이는 게 절대 아니다.

요즘 이란이 많이 뉴스에 나오고 있다. 자본의 흐름은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한 차원. 그런데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변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변형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지점들이 있다. 이슬람, 왕이 있고 독점하고 그 아랫사람들이 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무지몽매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고가 우리와 전혀 다른 게 있기 때문이다. 자본화되지 않는 문물들이 있기는 한 것. 그게 꼭 좋은 것도 아니지만. 어떤 문화를 이해할 때 근원적인 지점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의심할 수 있고, 그렇게 질문해야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것을 말하는 의미없는 말만 하게 됨. 다른데, 다름을 통해서 자기 인식을 점검해야 한다.


의식과 본질

마위야와 후위야가 나오는 <의식과 본질>. 도대체 본질이란 보편적인 것인가? 보편적인 본질이 있고 개별적인 현상이 있는가. 아니면 본질 자체가 보편적인 게 있고 현상적인 게 있는가? 그럼 우리의 의식은 무엇과 연관이 있는가?

성리학의 미발/이발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잘 이해한 것. 시에서 바쇼와 말라르메. 이들이 시적으로 뭔가를 포착한 것은 현상인가 본질인가. 송대 유학에서는 도대체 본지로가 인식을 어떻게 보고 있나? 본질과 의식의 문제에서 집중할 것. 이슬람 철학에서는? 불교 선종에서는 의식과 본질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했는가? 의식과 본질이라는 문제를 정리하고 나머지 디테일은 몰라도 됨. 정리하고 내가 생각하는 의식과 본질에 대해 점검해 볼 것. 내가 의식과 연관맺은 것은 현상이었나? 그럴 리 없음. 다들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게 됨. 특히 자기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생각함.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뭔가에 대해서든 본질을 규정하는 게 있다.

예술이 보는 것은 본질인가? 현상인가? 본질과 현상이란 나뉘어져 있는가? 결합되어 있는것인가? 왜 이걸 나눠서 말하는가? 이 문제는 '나'로 환원되기도 함.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것'에 불과한가? 그렇다고 '보이는 것'을 총합하면 '나'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이것도 의식과 본질의 문제.


2장 마히야와 후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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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보편적 본질 마히야와 개체적 본질 후위야. 우리 상식에서 본질과 대립되는 것은 현상. 본질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아니면 그 구체적인 것을 관통하는 공통성? 이에 따라 본질에 대한 철학의 해석들이 다 다름. 어쨌든 현상에 대해서 원인이 됐든 뭐든 상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모든 드러난 차원의 근본 원인), 플라톤의 이데아. 본질이라는 것을 모두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이슬람 철학은 이상한 개념을 만들었다. 보편적인 규정성을 실재계라고 한다. 대문자 리얼리티. 우리는 실재라고 하면 컵, 복숭이라고 생각하는데 리얼하다고 하는 것은 철학 개념에서 본질을 말한다. 우리가 요즘 쓰는 레알과 전혀 다르다. 그럼 사실계란 구체적 경험의 세계. 현상계. 실재에 속하는 게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 칸트의 물 자체. 아무튼 이 두 개를 보통 우리는 분리한다. 그런데 이슬람철학은 희한한 개념을 만들었다. 본질 자체를 두 개로 만든다.


마히야와 후위야. 일반적 의미의 본질, 보편적 본질. 마히야. 꽃이 여러개가 있는에 어쨌든 '꽃'이라고 하는 것은 마히야. 그런데 같은 꽃이라도 각각 모두가 다르다. 그 꽃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의미의 본질이 후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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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히야는 X를 X답게 만드는 X의 성질. 일종의 이데아. 그런데 후위야란. '이' 꽃. '지금 이' 것. 둔스 스코투스. '히케이타스', 이것임. 들뢰즈가 '되기'장에서 말하는 것. '이것임'. 환원 불가능한 그 개체의 고유성. 그럼 꽃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본질과 그 꽃, 그 날 그 때 그 모양으로 피어있는 그 꽃. 이 꽃이 가지고 있는 개체성. 이걸 어떻게 연결시킬지가 문제다.

둔스 스코투스는 들뢰즈에 많이 나오고 스피노자 철학에도 영향을 많이 줬다. '이것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6세기 사람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바로 앞세대. 합리주의가 대두되기 전의 16세기. 중세철학을 합리적으로 일변한 사람이 둔스. 중세철학은 신을 전제하고 신이 모든 것에 신적인 것을 집어넣어 창조했다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세계관이 있었다. 신과 개별자의 구분. 신은 오직 신적인 본질이 있고, 개별자는 신적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둔스는 모든 것에 보편적인 본질이 있다(신적인 것). 그 보편성 안에서, 어떤 개별자들은 개체화의 원리에 의해 개별자가 된다. 개체화의 워니 이런 걸 말하는 사람이 들뢰즈, 질베르 시몽동 등. 개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성을 어떻게 실체화 하지 않을 것인가. 이래야 내재성의 철학이 될 수 있다. 둔스는 신이 있고 개체가 있는 초월철학을 내재화. 보편적인 신이 있고 신적인 것을 바탕으로 각각의 개체성이 형성. 스피노자는 이를 다듬은 것. '이것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흙이 있다고 생각해 보면 흙이라는 게 하나의 보편적 본질. 그런데 그 흙이 컵이 되기도 하고 막대기가 되기도 함. 그렇게 만들어진 구체성이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것임'. 흙을 질료로 열개의 막대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각각의 막대기는 환원 될 수 없는 '이것임'이 있다. 보편적인 본질 +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것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후위야.

그럼 본질이 두 개?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를 가리키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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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현전하는 X를 지금 여기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이것임'(후위야)' 그런데 우리의 표층의식이 거기에 향하는 순간 다시 막대기라는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버림. 언어는 이런 역할. 언어 속에는 구체성을 담을 수가 없음. 언어란 세계의 질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세계의 실상은 본질로 이루어진 게 아닌데 말하는 순간 '통칭'하게 됨.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


76페이지. 그렇게 보면 마히야는 후위야의 그림자일 뿐. 개체성을 가진 것이 그림자라고 생각하게 됨. 그런 방식으로 무엇을 더 내 사고와 관련해서 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가 다르다.


이븐 시나

이슬람 철학이 '알라가 만들었다'가 끝이 아니다. 신이 만들 이 세계에는 불가해한 것이 있음. 신이 만든 것은 꽃인가? 아니면 '이' 꽃인가? 신이 만들었다고 할 때와 풀리지 않음. 뭐가 더 먼저인가? 꽃을 인식해야 '이' 꽃이 있는가? '이' 꽃이 있어야 꽃이 만들어지는가? 내가 뭘 진짜로 파악하는가의 문제. 이 세계는 다 각자가 만들어내는 허구. 이 허구가 우리를 어떻게 살게 하는가? 이것과 연관. 뭐가 진짜라고 생각하는가가 다르면 추구하는 것이 다 달라진다.

삶의 방식이 도덕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님. 인식에 의해 결정된다.

각자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따른다.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진짜라고 믿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자기가 뭐를 추구하고 있으면서 '돈이 허망하다'라고 말하는 건 돈이 허망하다고 생각하지 않다. 거기에 삶의 진짜가 있다고 믿으니까 추구하는 것. 그 사람은 거기서 가치를 갖는 것. 의식의 문제는 단지 형이상학이 아니다.

<장자>: 모든 것이 다 도의 작용이고 하나다, 라고 하면? 각자의 옳음을 가지고 다 싸우게 되는 세계에서는 싸우지만 세개/네개와 네개/세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줘서 싸우지 않게 함. 도의 세계를 모르면 위에 있어서 우쭐/아래에 있으면 자학. 세계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철학이 필요하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음. 철학이 없으면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에 다름아님. 능동적인 자기주체성. 내가 나의 기준을 가지고 잘 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도덕이 아니라 철학,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낸다,

이븐시나: 전 보편적 본질이라는 것을 말함. 보편적이지도 개별적이지도 않은 본질. 더 원초적인 본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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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면 말이다 다만 그것 뿐.

경험계의 사물은, 소나 말의 본질은 순수하게 소나 말일 뿐 그 어떤 한정도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 이븐 시나는 어떤 근원적인 것은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함. 언어가 다르고 그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은 다름. 그러나 '도'는 왜 말하는가? 도를 말하지 않으면 생성을 얘기할 수 없음. A는 A고 B는 B라면 생성을 말할 수 없다. 고정된 것 이전의 차원을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됨. 그래서 공이니 도니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것.

공/도를 말하면 갑자기 그런 게 체현되는가? 아니다. 지성의 능력을 끝까지 가져갈 것.

경험계의 사물이란 그 자체로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함. 경험계의 사물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일 뿐이다.


후설은 내비둬~


릴케와 바쇼.

릴케는 후위야로 달려갔다.

시인은 뭘 다루는가? 이데아를 다루지 않는다. 시인은 이 꽃 저 꽃 다 버리고 꽃 일반을 다루지 않음. 릴케 같은 시인은 지금 여기에 피어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이 꽃을 봄. 이것의 극단은 와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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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쇼는 마히야가 후위야로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함. 하이쿠의 언어는 매우 간단. 간략한 사물만 드러난다. 어떤 논리성도 없다. 아주 간단한 사물에 대한 한 줄짜리 시. 그런데 읽으면 갑자기 가을이 확 밀려옴. 하이쿠는 묘사도 아님. 그런데 그걸 읽으면 가을의 본질이 훅 하고 들어옴. 그러니까 하이쿠라는 것은 드러난 세계를 포착하는데 그 드러난 세계가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 함축하고 있는 세계임. 시의 본질은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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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 얼마나 많은 움직임이 있는가. 그런 것들을 다 담고 있는 찰나. 그리고 '이' 나뭇잎 하나를 보여주지만 그 나뭇잎이 이 세계의 보편적 본질에 가닿는 나뭇잎의 운동임. 바쇼의 하이쿠는 현상 속에 이미 본질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줌. 본질은 가장 구체적인 사물의 표층과 함께 작용하고 있는 심층이다.

하이쿠는 언어를 가지고 가장 간명한 언어. 가장 간명하고 단순한 언어를 가지고 그 언어에 담기지 않는 세계의 속성을 담는다.


말라르메

니체에게 영향을 줬고 폴 발레리를 위시하여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인. 유명한 시 중 하나는 '주사위 던지기'. 이 시는 그 자체로 번역할 수 없는 시.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한 페이지에 있음. 다음 페이지로 가면 '결코 영원한 상황 속으로 던져져 있다' 그 다음은 행도 다 다르고 어떤 단어들은 떨어져서 배치되고 있음. 어떤 단어들은 크게 적혀있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는 되게 넓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글씨가 크고 작고 기울어져 있음.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영원한 상황 속으로 던져져 있다 하더라도 파선의 밑바닥에서.

말이 안되는 시어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일단 낭송을 할 때 진하게 크게 되어 있는 것은 그걸 살려서 낭송하기. 그 다음에 작게 나온 것은 작게 진하게. 이탤릭은 이탤릭으로 읽어야. 몸짓, 어조, 표정 이런 것을 모두 구현해야 존재하는 시. 게다가 뜻도. 떠러지는 연들에서 결코가 어떤 연과 연관되는지. 연 자체가 죽 연결되는 게 아니라 이 앞에 있는 것은 몇번째의 것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따라 시가 달라짐. 읽어 내려가면서 첫째 줄하고 둘째 줄은 결코 균질적으로 이어지지 않음.

말라르메는 번역도 읽기도 불가능한 시. 다만 신체성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는 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언어라는 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읽기의 위계도 무너뜨리고 언어의 의미도 텅 비어버림.

말라르메는 19세기 말 유명한 그 당시 파리에 살았던 아주 많은 예술가가 모이는 '화요회'에 따르며 말라르메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말했다. 그 에너지 장을 경험한 사람들. 이 화요회는 메카. 당시 19세기 가장 아방가르드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메카. 거기 가면 일종의 마법. 시를 짓는데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문학과 글쓰기를 완전히 바꿔버린 사람. 니체, 블랑쇼, 데리다가 영향받음. 쓰여진 언어가 우리가 언어라고 생각하고 의미라고 생각하는 규정성을 완벽히 허물어버림. 이 언어는 어떤 언어를 대체하는 언어도 의미도 아님. 모든 의미작용의 방식들을 스톱시킴.

언어는 낭송하며 내는 몸짓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 신체성을 복권시킨 것이기도하고 시어가 모든 것을 무화시킴. 우리의 의미작용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시어. 4장에서 말라르메를 갖고 온 이유.


112페이지

언어 의식의 북쪽 끝.

언어인데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의 차원을 발명한 것. 이것은 의식과 본질의 문제에서 본다면 이런 말라르메의 언어가 어떤 무라고 하는 차원에 우리를 이르게 함. 바쇼는 현상을 떠나지 않을 때 본질을 느끼게 함. 하지만 말라르메는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기에 말라르메는 본질로 우리를 데려감. 하지만 이때 본질은 이데아가아님. 같은 본질이라도 보편성인지 무인지에 따라 말하는 것이 완전 달라진다.

불교에서 모든 것을 공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데아도 아님. 어떤 것도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것이 공. 그러므로 이데아 같은 모든 것에 내재하는 보편성이 아님. 본질을 모두가 말하지만 본질을 어떻게 말하는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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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하는 것은 개체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개체. 그런데 그 개체성은 일반적인 본질(신)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신과 개체의 관계(스콜라 철학-중시 대학 철학). 중세 철학의 핵심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개체'이며 그 개체들은 모두 있다. 그 각각의 개체를 있게 하는 근원적 본질은 신이다.

이때 보편성을 강조하는지 개체성을 강조하는지는 항상 스콜라 철학의 문제. '이' 꽃을 강조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약화된다. 개별자에 내재해 있는 윤리리가 중요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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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형. 본질과 개체의 문제를 파악하는 유형. 그러나 송대 성리학, 이슬람철학, 불교를 각각 보면 됨. 세계는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고 나에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까? 내가 이렇게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삶의 윤리를 추동해 낼까? 어떤 종교를 따르든 상관없음. 각자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윤리를 구성할지 생각해 볼 것.


4장. 송대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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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유학에서는 리라는 개념이 형이상학적 특권을 차지하는 개념이 아니었음. 북송 이전의 유학이란 주로 정치학. 그런데 유학이 형이상학으로 올라간 게 송대유학자. 그 사람들의 철학체계 속에서 리의 개념이 부각되기 시작함. 리, 성. 이런 것이 부각되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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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 이치를 탐구한다. 여기에 플러스, 격물. 격물궁리. 대학에 나오는 이야기. 격물이란 무엇인가. 물로 나아간다는 뜻임. 물로 나아간다는 것은 탐구한다는 것. 물이라는 건 현상. 물은 사물이기도 하지만 사건이기도 함. 서양식으로 말하면 현상. 그 현상을 열심히 탐구해서 그 현상으로부터 이치를 끌어내야 함. 이치까지 이르러야 한다.

동양에는 소학(小學)이 있고 대학(大學)이 있다. 소학은 세소응대. 비질하고 인사 잘하면 됨. 하지만 대인의 학문은 거기서 끝나면 안됨. 열심히 궁구해서 이치에 이르러야 한다. 큰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대학.

격물궁리란 뭔가? 격물궁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 지식인, 士란 독서인.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중국에서 지식인들에게 다 중요하지만 그게 지식인으로 규정된 것도 송대. 책, 경전에는 모든 이치가 담겨 있다. 그것들을 열심히 탐구하는 것. 결국 경전을 이해하고 현상을 이해함. 격물궁리. 이것이 학문의 태도.

그런데 공부만 하면 안됨. 그것을 자기것으로 체화시켜야 함: 수신.

수신의 핵심은 敬. 조심하고 삼감. =愼. 대학의 핵심.

대학에는 공부가 뭐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와꾸가 잡혀 있음. 1. 공부를 열심히 할 것. 2. 자신의 일상을 조심하고 삼가야 햄. 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런 건 다 없었다. 공자님 말씀은 단지 '學'. 그런데 이걸 하나의 체계로 만든 것. 지식인의 정신세계가 형성된 것은 북송시절. 당나라 때는 지식인이라는 건 문학 좀 하고 글을 쓰고 풍류를 즐기는 이미지. 그런데 공부를 하고 일상에서 자기 자신의 모든 행실을 다듬는 지식인상이 나타난 것은 송대. 그리고 이런 지식인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구도가 만들어짐. 사대부.

사대부: 사+대부=지식인+정치인.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지식인으로 살면서 정치한다는 것. 격물궁리하고 수신하지 않으면서 정치가일 수는 없음. 격물궁리한다고 할 때. 수신의 차원은 딱히 공자가 강조하지 않았음. 공자는 그저 공부하라고 했음. 예를 지키라고 했음. 앉아서 의식을 고요히 하고 이런 얘기 없음. 이 차원 바로 정좌.

당나라 시절은 불교. 선종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했고 공부를 한다면 스님에게 가서 배우는 일이 있었음. 다 한번쯤 참선을 함. 유학에는 수행법이 없음. 이 수행법을 불교에서 갖고 옴. 정좌는 참선과 비슷. 아예 가지고 옴. 정좌하여 마음의 고요함에 이름. 궁리는 본질탐구.


이즈쓰 도시히코는 의식과 본질의 관점에서 정좌와 궁리라는 두 가지 차원을 의식과 본질 깔때기로 보았다. 그래서 미발과 이발 개념을 가져왔다. 이것도 공자가 말한 적은 없다. 정이천이 말했다. 이미 드러난 것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 우리는 보통 이발의 차원에 있다. 이발은 감정이 발생한 차원. 희노애락애오욕이 발생한다. 그렇게 발생하면 아, 화가 났다, 기쁘다 하고 알아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아차렸기 떄문이다. 감정이 현상화 된다. 그런데 감정이 일어났을 때 정좌하고(지관수행)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잘 보는 것. 그러면 어떤 마음이 (121페이지) A와 B가 연속적이지 않고 중간이 끊김. 화난 상태가 아닌 상태를 감지하게 된다.


120페이지를 보면 미발은 우리가 주의 깊게 의식하면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을 짧게나마 경험한다. 정좌를 그렇게 한다. 마음이 막 휘둘리지 않음. 대단한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가만히 자기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그 감정상태에 끄달리지 않는 것.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상태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걸 통해서 이발, 마음이 동요되어 일어난 상태는 감정의 예속. 그 감정이 예속된 상태란 성리학자의 말로 하면 사심에 지배되는 상태. 사심은 전체성 속에서 자기를 자각하지 못하고 자기 것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사심. 감정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나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정좌를 하게 되면 마음이 계속 예속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 그럼 감정과 다른 차원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됨.

그러니까 미발이란 더 근원적인 상태. 그렇다고 미발과 이발은 선후관계가 아님. 마음의 더 근원적인 상태와 감정이 요동치는 상태가 이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근원적인 상태를 늘려가자는 것.

그런데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북송시절에는 불교가 너무나 타락했고 불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기에는 무, 공을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 무와 공은 현실참여적이지 않다. 북송 때 지식인의 핵심은 지식인의 자기집단화. 자기들의 정치에 들어갈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 정치에 적극 참여를 해야 했음. 그러므로 북송시절 지식인들의 논리는 신권을 강화하는 것. 지식인 계급의 자기세력화가 목적. 그러면 당연히 지식인을 규정할 수 있는 철학체계가 있어야 하고 그런 철학체계를 바탕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실천성이 있어야 한다. 탈속적인 불교를 완전히 가져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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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의 대립에서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정좌를 다시 규정. 정좌를 통해 우리의 사욕을 끊임없이 내치는 것이다. 성리학자의 테제는 너무나 분명하다. 존천리거인욕( 存天理,去人欲).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한다. 천리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인욕이 지배하기 때문에 막 살게 된다. 그러니까 인욕을 제거하고 원래 가지고 있는 천리를 보존하면 된다. 이때 사욕은 욕망일반이 아님.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 유가가 모든 욕망을 다 부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기질이 한쪽으로 치우칠 때 생겨나게 된다. 우리는 기질을 다 타고나는데 어딘가는 모자르고 어딘가는 넘치게 된다. 이걸 조절해줘야 한다.

자기 기질을 잘 다스리는 법을 몰라서 생긴대로 살면서 식색재물물에 탐닉함.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

그런데 너의 본성에는 그렇지 않은 차원이 있다. 그게 천리임. 천리라는 것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상태. 성. 그래서 성리학.

자신의 기질을 잘 다스려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품부받은 그 자연의 원리(리, 보편적 준칙)를 따르는 것. 이 이치를 설명해놓은 것이 주역. 우주의 이치를 잘 알면 집착하지 않을 것. 이치를 따르면 나쁜 일이 사실 나쁜 일이 아니고 좋은 일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가령 집안사. 며느리에게 1차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남. 하지만 그 며느리와 아들이 있기 때문에 끔찍하게 생각하게 되는 손자가 있다. 가족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세계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함. 자연은 늘 균형을 이루고 있음.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갖겠다고 주장함. 돈도 열심히 벌고 좋은 책도 읽고 그런 건 없다. 모든 것은 가치의 우선선위 문제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뿐. 선택하고 다른 것은 저절로 따라오는 건 없다.

성리학의 天,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우주의 당연한 법칙을 알고 보존할 것.

그런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끄달리게 되면 자기 기질에 따라 탐욕에 따라 살 수박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수행 없는 자가 정치를 하면 국가를 말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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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은 이발과 차원이 다르지 않다. 수행을 계속 하면 아무리 외부의 상황이 나와도 마음이 늘 고요함. 그것이 미발. 잠깐 마음이 나타났더라도 다시 마음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감. 그런데 만약 미발의 차원을 말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감정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가게 된다. 스피노자도 정서에 예속되지 말자고 함. 어떻게 정서에 예속되지 않을까? 정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라. 대개 잘못된 인과관계를 엮는 것에서 출발함.(남탓, 존재가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 스피노자는 여기서 이해하라고 한다. 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성리학자: 공부하고 경험적으로 체득하라(궁리와 정좌)

무극이 태극: 없다는 것과 시작은 구분되지 않는다. 본질과 현상을 나누지 않음. 현상을 제거해야만 본질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동양에서는 현상이라는 게 본질적 차원과 어긋나 있지 않음. 바다와 파도의 관계일 뿐. 파도는 바다와 분리되지 않으며 바다는 파도의 요동을 끝까지 갖고 가지 않고 심층은 늘 고요하다.


리일분수 (理一分殊). 월인천강 (月印千江). 달은 하나. 천개의 강에 달이 비친다. 이치는 하나이지만 우리의 경험세계에는 다 드러난다. 이중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라고 할 수 없다. 달이 강에 도장을 찍었다. (카피와 다름, 이데아와 시뮬라크르의 관계가 아님). 이치는 현상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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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주역적인 깨달음. 자연의 의식을 체화하는 것.

정자와 궁리, 의식적인 공부활동과 그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둘로 나누지 않는 것. 수행/공부. 좌선/공부. 선비에게 요구되는 삶. 그래서 어려웠다.

존재계의 사물에는 반드시 제각기의 본질이 있다. 본질이 내 바깥에 있지 않음. 동양에서 본질은 초월적이지 않음. 스콜라철학에서 본질은 초월적인. 것 개체적인 것 바깥에 있음. 동양에서는 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음. 그래서 초월론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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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계의 진상,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참됨은 그게 사물의 본질. 거기에 이미 천리가 구현되어 있다.



5강.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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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문제는 보편적 실재성을 인정하는가 여부.

이슬람 사상은 그리스 철학과의 교통을 통해서 발생. 지금은 서유럽과 이슬람을 단절적이라고 느끼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대로 이슬람으로 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내쳐짐. 일등제자 아카데미아를 아리스토텔레스 아닌 조카에게 물려준 플라톤. 몇가지 설이 있다더라. 1. 플라톤과 다른 사상. 2. 마케도니아 출신 아리스토텔리스(이방인). 등등.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물려받지 못하고 소요학파를 만듦. 주로 산책을 하면서 토론했다고 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아시아로 퍼진다. (도서관).

로마세계는 기독교가 점령.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본토가 아니라 아시아로 갔다가 역수임 됨. 그 사이에 아베로에스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가 나왔음. 그러다보니 그리스철학과 이슬람 철학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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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인과율의 사고방식.

단선적인 인과관계.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원인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스피노자: 계열이 다르면 다르게 영향을 미친다. 또 다른 계열에서 또다른 원인이 나타나며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단지 원인의 일부일 뿐. 단선적인 인과율 아님.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작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을 스피노자는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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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빼도박도 못하는 원인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사물이 언제나 자기 본질이 있고 그 자기본질이 있는 사물들의 인과가 성립됨. 그럼 모든 것은 다 결정되어 있을 것. 우연이 부정된다.

스피노자의 결정론: 기계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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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안에서 보면 알라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신의 절대 의지가 부정될 위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을 가져오는 순간 신을 부정하게 됨. 그래서 가잘리 같은 사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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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일어나는 것은 인과율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지만 사실 그건 습관. 사실 모두가 우연이다. 인과율을 부정하면 일체 존재의 본질을 부정한다. 이슬람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집대성한 아베로에스, 원자론 가잘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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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의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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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는 원자론에 전면으로 반대하여 존재와 작용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음. 존재하는 것은 자기 운동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함. 존재자의 내적구조에서 작용이 생긴다.

모든 존재자는 자기 운동성을 자기가 가지고 있고 그것이 본질이다.

이 세계에서 본질이 없다고 하면 혼란스럽게 되고 불가지론이 된다.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 본질과 운동성을 부여했다고 봄. 신은 여전히 있음. 신이란 어떤 방식으로 우리 존재자와 관계되는가? 각각에 본질을 부여하고 운동도 함께 주어서 인과법칙에 따라서 운동하도록 했다. 이것이 알라의 뜻.

알라의 뜻인데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다른 것.


정치적으로 봤을 때? 구체적인 사안마다 서로 충돌할 것 같음. 아마 호메이니 읽으면서 알 수 있을 것. 현대사 문제를 이슬람 기본적인 사고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다를 것.

사물 자신이 자신의 로고스를 가지고 움직인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떄 '알라의 뜻이다'는 인과 속에서 일어났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알라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위했다는 뜻인지 알아야 함. 여기서 갈라지기 시작하면 신을 가지고 어떻게 현상을 해석하느냐가 다 달라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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