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시즌2] 2주차(5월 17일) 공지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05-13 17:41
조회
123
오랜 공백 끝에 시즌 2가 개강을 했습니다~!!  예술 인류학 첫 번째 시즌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예술의 기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예술의 맥락화와 탈맥락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눌 예정입니다. 어떤 사물도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시공간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예술이 놓인 맥락을 볼 때 예술을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작품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전복시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본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배치 속에서 그것을 ‘보도록 되어 있는지’, 그 조건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번 시즌에는 사물을 중심으로 보는 시선을 의심하고, 그 사물이 배치되는 조건을 사유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주 차에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읽었습니다. 푸코는 이 책에서 현시대는 공간의 시대이며, 우리는 공간이 ‘배치 관계의 형식 아래 주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배치의 문제가 현대에 와서 중요해진 이유는 국가가 공간을 통제하는 시대와 다르게, 공간의 사적 소유가 자유로워지고 공간이 기술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술과 공간을 중립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속에서 권력은 기술과 공간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코뮨이 돌아왔다>에 따르면 권력은 “엔지니어링되고 조형되고 디자인된 이 세계의 조직화 자체”입니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기술이 공간의 배치를 결정하고 사물들을 관리하고 인간을 통치합니다. 우리는 기술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중립적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푸코는 공간에 우리 신체를 규정짓는 권력이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헤테로토피아>에서 푸코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안의 공간’이 아닌 ‘바깥의 공간’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이 ‘바깥’은 ‘안’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안과 경계를 이루는 공간입니다. 바깥은 안의 공간과 동시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둘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푸코가 바깥의 공간(경계)에 주목하는 것은 안과 밖을 동시에 사유함으로써 공간을 역동적인 관점에서 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공간을 만들면 안과 밖이 동시에 생성되고, 안과 밖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곳마다 공간이 구성됩니다. 이러한 이질 발생적 공간에서는 이에 맞는 이질적 실천 행위가 따라 나오고, 이런 실천들이 공간을 다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의 배치를 통해 차이를 발생시키는 역동적인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테로토피아 또한 푸코가 공간을 바라보는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종의 반-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입니다. 반-배치라는 것이 배치에 대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과 밖의 관계처럼 배치의 공간과 동시에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배치의 공간인 도시가 만들어지되면 반-배치의 공간인 슬럼화가 동시에 생겨납니다. 헤테로토피아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미술관은 일반적 공간의 배치 속에 있는 홈이 움푹 패인 공간입니다. 미술관에 가면 개별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 놓인 공간의 배치를 통해 시간이 질서정연하게 전개되어왔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미술관의 배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갖게 하고 시간의 순차적 전개에 따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공간의 이질적인 배치가 신체에 권력을 새기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규정짓습니다.

헤테로토피아의 또 다른 사례인 학교는 특정한 방식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입니다.  신체를 일괄된 틀에 가두는 공간의 배치가 학교를 억압의 공간으로 만들지만 이런 공간의 배치가 고정불변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이전의 공간의 배치와 전혀 무관한 실천(학교 기물을 부수고 시험을 거부하는 등)을 해서 공간의 배치가 달라지면 억압의 공간은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한 기능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실천에 따른 배치의 변화에 따라서 다르게 규정될 수 있습니다. 푸코는 해방과 억압의 공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고려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나는 기능상 근본적으로 –그 진정한 본질에 있어서- 해방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자유는 실천입니다. (..) 사람들의 자유는 결코 그것을 보장해주는 법이나 제도에 의해 확보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법과 제도는 거의 모두 반대의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것들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는 행사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헤테로토피아>, 73쪽)


안과 밖, 배치와 반-배치, 그리고 해방과 억압은 분리되어서 어떤 층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억압적인 공간의 다른 측면에 해방적인 공간이 있지 않습니다.이 둘이 동시에 존재함의 가능성을 고려할 때 역동적으로 공간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규율 권력이 신체를 길들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실천 또한 공간의 배치를 재구성합니다. 푸코는 이런 공간의 배치를 바꾸기 위해서 제도적 차원의 해법이 아니라 실천의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기존 공간의 배치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실천을 통한 배치의 변화가 공간을 해방구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간은 관계의 총체로서 끊임없이 재구성됩니다.

2주차에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을 읽고 공통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한역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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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4 08:07
    '기존 공간의 배치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실천을 통한 배치의 변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참 깊은 사유네요. 철학은 정말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는 걸 또 한번 느낍니다. '공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푸코의 저 놀라운 해석!! 참 멋진 공부들을 하고 계시네요... 감당하지도 못할 게 뻔한 공부 탐심이 자꾸만 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