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5주차 공지 및 후기 :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1부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06-03 16:15
조회
114
이번 시간에는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 1부를 읽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책인 만큼 내용도 방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애를 먹었습니다. 채운샘은 텍스트에 관한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토론에서 나왔던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2장에는 지표와 상징, 도상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기호학적 개념입니다. 도상icon은 무엇보다 외부세계와 실제의 것 사이의 닮음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도상기호는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체와 비슷하게 인식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상은 그것이 재현하고 있는 사물과의 유사성에 근거합니다. 동그랗고 빨간 빛깔에 녹색 잎사귀가 달려있는 그림을 두고 그것을 사과라고 인지하는 것과 같죠. 지표index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인과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기호입니다. 거리를 가다가 볼 수 있는 노란색을 바탕으로 빨간 삼각형 테두리 안에 그려진 삽 모양은 근방이 공사중임을 알려주는 표지이자 지표의 예시입니다. 풍향계 화살표의 움직임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인과적으로 말해준다는 의미에서 지표입니다. 기온이 올라가면 온도계의 눈금이 올라가고 기온이 내려가면 눈금이 내려가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지표를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상징symbol은 대상체와 대상체가 표상하는 것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나 인과적인 맥락도 없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할 때, 비둘기라는 말과 평화라는 말 사이에는 외형적으로 비슷한 구석도, 원인과 결과를 특정할 수 있는 맥락도 없습니다. 상징에서 대상체와 표상체의 관계는 자의적입니다. 무지개가 희망을 상징한다는 것, 무궁화가 한국인들에게 국가를 환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징은 특정한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책에서 이미지의 재현성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관해 채운샘은 재현 개념이 갖는 철학적인 문제를 말해주셨습니다. 재현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영어에서 representation이라고 씁니다. ‘표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미술 분야에서는 주로 ‘재현’이라고 번역되는 개념입니다. 들뢰즈는 이미지의 재현이 갖는 문제를 고민했던 철학자였습니다. 들뢰즈도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을 논의했지만, 무의식이 이미지로 현상되는 순간인 꿈에 대해 프로이트와 다른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무의식은 그 자체로 다양한 의미의 출현을 야기하는 힘이기 때문에, 하나의 표상에만 가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아이가 어느 날 밤에 한 무리의 늑대가 나오는 꿈을 꿉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늑대가 나오는 꿈을 갖고 그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틀 안에서 분석합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늑대는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투영된 대상이고, 따라서 그것은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성적욕망을 품고 있는 꿈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늑대 이미지는 여기서 아버지라는 표상을 동일하게 재현한 산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재현을 비판했던 맥락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개념을 동일하게 표상하는 산물로써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현상되는 것은 끊임없는 차이와 생성이 반복되는 과정이지, 원본성을 향한 동일한 반복의 과정이 아니었던 것이죠. 들뢰즈에게 중요했던 것은 하나의 아버지로 환원될 수 없는 욕망의 다양체, 그것을 표현한 이미지로써 늑대'들'인 것입니다.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이미지의 재현성을 보는 관점의 뿌리는 플라톤의 논리에 닿아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영원불멸한 원본을 가정하고,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존재는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플라톤이 예술(특히 회화)의 존재론을 부정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현실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화가의 작업은 결국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계를 다시 한 번 모방하는 데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 들뢰즈의 예술론은 이데아의 논리에 복속되지 않는 회화 자체의 논리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렸던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참조했지만, 그것은 자화상과 자신의 얼굴이 형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들뢰즈가 발견했던 예술 고유의 언어는 감각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베이컨의 그림이 주는 낯선 인상은 공포를 재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가 그렸던 작품에는 일부러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 관습적으로 인용되는 장치인 흥건한 핏자국 따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에는 섬뜩한 힘이 느껴집니다. 무엇으로 환원되어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질감이 그 자체로 고유한 논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서 이전에 봤던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한 작품들의 몇몇 장면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찾아보니 린치 감독이 존경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고 하는군요.) 마그리트가 남긴 그림을 비평했던 푸코의 예술론도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원본을 위시하지 않는 회화 자체의 존재론를 숙고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의 부제는 ‘서구적 시선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시선이란 무엇일까요? 본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는 觀(볼 관), 見(볼 견), 視(볼 시)라고 표현하는 반면, 영어에서 해당하는 단어는 Look, See, Watch 등이 있습니다. 특히 ‘응시하다’라는 뜻을 지닌 Gaze라는 단어는 ‘시선의 문제’와 결부되어 좀 더 특별한 의미에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시선 개념은 그 자체로 순수한 ‘보기’일 수 없고, 본다는 행위 자체에 내장된 사회문화적이고 구조적인 맥락까지 짚고 있는 단어입니다. 서구적 시선이라는 말이 간직한 뜻은 어떤 것을 본다는 행위에 담긴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서구적 전통과 닿아있으며, 그러한 실천이 구체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무의식적 지층을 건드립니다. 그것은 서구적 시선의 역사를 검토하는 시도 그 자체가 방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장에서 드브레는 이미지의 탄생이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 만물은 태어나면 언젠가 소멸하게 마련이지만, 여타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소멸하는 것을 남다르게 자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죽음을 그렇게 특별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드브레의 논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 그려진 그림에서 출발합니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인류가 자신의 형상을 남겨놓으려 했던 것에 대해, 드브레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저항이자 영생에 관한 오래된 믿음을 말해준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파괴에 ‘이미지라는 재생’으로 맞선다”(<이미지의 삶과 죽음>, 글항아리, p.37) 오랜 세기 동안에 서양 회화의 전통이었던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화려한 사치품, 먹음직스러운 과일, 예쁜 꽃들을 그려놓지만 공간의 한 쪽에는 어김없이 해골바가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모든 현존하는 것은 덧없이 사라져간다는 공통감각 앞에서 서구인들이 죽음 자체를 강박적으로 여기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에 대한 강박은 지금 이렇게 덧없이 소멸하고 있는 순간자체를 어떻게든 붙잡아두려는 욕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827년에 그려진 외젠 들라클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처럼 말이죠. 아시리아의 전제군주였던 사르다나팔루스는 중국 고대사의 걸왕과 주왕만큼이나 폭정을 일삼았던 왕이었습니다.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이 하루하루 방탕하게 살던 어느 날, 반란이 터집니다. 충복들이 왕에게 도망가라고 외쳤지만 그는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그동안 왕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을 한데 모아놓고, 자신의 심복을 시켜서 그녀들을 차례대로 죽입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르다나팔의 처연한 눈빛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언젠가 소멸될 것이 분명한 것들의 죽음을 통해, 그는 어쩌면 그것을 역설적으로 완벽하게 소유하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브레의 견해를 숙고해보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하는 욕망이 이미지의 기원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가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을 붙잡아두기 위한 유화적 전통과 더불어, 훗날 발명된 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닿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다는 행위 자체는 어떤 상象을 붙잡는 것입니다. 죽음에 저항하기 위한 흔적(이미지)을 남겨놓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소유의 감각,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 채운샘이 저에게 이미지의 기원이 정말로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물어본 순간이 기억나네요. 당시에는 얼버무렸지만, 그러한 관점도 ‘서구적 시선’이라는 맥락에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채운샘은 동양의 미술에서는 오히려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 자체를 특별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이미지와 죽음의 문제가 던져주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쟁점을 고민해보면 좋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2장에서는 말과 이미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은 그 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언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자기에게 익숙할 문법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이 갖는 다른 층위와 관점들 속에서 제각기 직조되기 마련입니다. 이미지를 느끼고 해석해내는 방식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이미지 자체에는 고유한 속성이 따로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미지 자체는 언제든지 언어적 표현을 배반해낼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채운샘은 마그리트의 작품을 예시로 언어적 표현과 이미지 간의 모순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에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습니다. 관습에 따르면 그림 속 형상을 두고 ‘파이프’라고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파이프 모양의 그림의 바로 아래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마그리트가 이 같은 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파이프 모양의 그림은 정말 ‘pipe’일까, 하고 묻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pipe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파이프 모양의 그림을 pipe로 인식하는 까닭은 이미지를 재현적인 방식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그리트가 그린 곡선 모양과 갈색 바탕을 한 형체는 ’pipe‘라고 칭해지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환기하는 것은,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도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뿐, 결코 언어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흐가 그린 <구두>는 단지 ‘구두’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그림으로 읽혀지길 거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낡고 헝클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구두의 거친 질감은 그것을 신었을 법한 누군가의 흔적과 관계 맺고 있습니다. 구두의 주인은 화가의 단순한 지인일 수도, 고흐의 아버지일 수도,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군인의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는 각자마다 익히 알고 있을 또 다른 누구의 삶과 연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군가는 그야말로 ‘누구든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고흐의 구두에는 무엇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 힘은 누군가의 발에서, 발이 걸어온 삶의 고단한 여로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미지와 언어의 문제는 어떤 예술작품을 보는 우리의 관습을 묻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의 인식이 의미를 작동시키는 기존의 관습적인 체계에 얼마만큼 붙들려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림을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이미지를 어떻게 원본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숙고하게 만들고, 한편으로 이미지가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지를 묻게 만듭니다. 재현성에 가둬진 이미지는 불임에 시달립니다. 다른 의미의 차원으로 발화될 수 있는 힘을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관습적으로 규정된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차이’에 주목할 때, 우리는 이미지에 담긴 남다른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장에서는 기독교와 예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종교가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와 예술의 관계를 거칠게 말해보자면,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의 가시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상상적인 관념으로 이뤄진 종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주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상상의 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조형해낼 수 있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라파엘로가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장면이 담겨있습니다. 위쪽에는 가뿐히 하늘 높이 솟아오른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묘사되었고, 아래쪽에는 그것을 보고 경이로운 표정을 짓는 인간들이 널브러진 세계가 강렬한 색채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가’를 시각적으로 설득하는 고민은 엘 그레코에게도 있었습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아래쪽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매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쪽에는 백작의 영혼을 천사가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그려졌는데 이때 백작의 영혼은 마치 커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엘 그레코는 영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실체로 간주했던 것이죠.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간에 채운쌤은 그림을 설명하면서 예술은 종교가 아니었다면 어떤 관념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을지 모른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책의 3장에서 드브레는 종교미술에 나타나는 시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것은 더 생각해보면 특정한 시대에 통용된 종교적 코드가 ‘예술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출현시켰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채운샘은 이와 관련해서 프랑스 화가인 마네가 재해석한 성화의 사례를 인용했습니다. 중세 기독교 회화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에 그림을 보는 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릴 수 있도록 구도가 짜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네는 전통적 성화양식을 변용시켜서 관객의 시선이 보다 다양한 곳으로 분산되게끔 의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부축하는 두 천사들> 속의 그리스도를 부축하는 천사들의 표정은 당혹감을 줄 만큼 덤덤합니다. 천사들은 마치 사무적인 장례수행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막시밀라안 황제의 처형>이나 <폴리 베르제르 술집> 같은 그림을 보면 특유의 산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책에서 벤야민은 현대적 지각이 갖는 특징이 ‘정신집중’이 아닌, ‘정신분산’이라고 말한 대목이 환기되는 부분입니다. 그림은 실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가상 속의 환영을 지시하고 있는지 교란시키면서 그 자체로 복잡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회화는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창’ 같은 것이 아닙니다. 원본의 견고함이 사라진 세계에는 모든 것이 환영뿐인 것입니다. 이미지에 내재된 환영성은 죽음과 종교 같이 우리가 겪을 수 없고, 실재적이지 않은 것과의 관계에서 출현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그림과 함께 많은 것이 느껴졌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드브레의 책을 2부까지 읽고, 느낀 바를 공통과제로 써오면 됩니다. 간식은 지안샘이 맡아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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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4 07:42
    그림을 볼 때 당연히 무엇을 재현했는지 원본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들뢰즈가 재현을 비판하는 이유는재현 작용으로 그림을 볼 때 차이와 생성의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 이미지는 원본의 모방이 아니라 힘을 그리는 것. 이미지는 계속 생성되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