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6주차(6.21) 공지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06-19 10:49
조회
133
1.본다는 것



백남준의 <부처 tv>라는 작품에서 붓다가 보는 이미지는 실시간의 이미지일까요? 붓다는 자신과 자신이 사라지는 모습을 동시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현재의 모습을 찍어서 송출된 이미지는 찰나일지라도 과거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은 존재한다는 것이 사라짐과 분리되어 존재함만 계속되는 게 아님을 보여줍니다. 생멸이 공존하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지의 역사’를 공부하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반복해서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인식 주체가 어떤 대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체주의적 인식론에서는 우리의 시각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눈이 있으니까 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 시선을 의심한다 해도, 보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다 정도에서 그치게 됩니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는 이미지의 역사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조건 속에 놓여 있는지', '무엇이 우리의 봄을 규정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가 탄생하고 사라지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관련 없을 것 같은, 사회적·종교적·기술적 문제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외적인 조건들의 변화 속에 본다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볼 때 인간의 눈은 그 대상을 납작하게 지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납작하게 지각한 것을 입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 입니다. 본다는 활동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본다는 것은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 규정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자체에 사회적 무의식을 포함한 무수한 타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2.이미지를 만들고 해석한다는 것

‘자연’을 그리라고 하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요? 나무를 그리면 될까요? 혹은 사람을 그린다는 게 뭘까요? 몸통을 그리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의 성상이나 비너스 조각상, 동굴벽화는 예수와 여자와 동물을 그린 것일까요? 조형미술은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요? 무엇을 추상한 것일까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언어는 분별적이기 때문에 사람, 동물, 감정 등을 실체를 지니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지로 표현한다고 할 때는 그것을 하나로 형상화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회화에서 분노를 표현한다고 할 때 화내는 사람을 그리면 되는 것일까요? 화내는 사람을 그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현실적으로 감정을 겪지만, 그것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늘 겪는 문제는 형상이나 언어를 갖고 있지는 않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고 있지만 구체적 형상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것을 회화는 표현합니다. 즉 회화는 현실적이지만 가시적이지 않는 것을 추상화합니다. 여기서 추상은 정확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힘을 표현함을 뜻합니다. 고다르는 이미지는 정확함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함의 언저리를 그리면서 어떻게 현실의 본질을 표현해낼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만들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수반됩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립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거꾸로, 보이는 것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아닐까요?



터너라는 영국 작가가 그린 풍경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닙니다. 터너는 바다에 휩쓸리는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배를 타고 들어가 자기를 묶어 놓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터너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바다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을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느낀 힘을 가시화한 것입니다. 반대로 그림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힘의 느낌대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그렸고 얼마나 정확히 그렸느냐가 아니라 이미지를 어떤 힘의 느낌으로 그려내고 해석해 낼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해석의 조건은 어디 있을까요? 예를 들어 무수한 이미지들의 운동으로 구성되는 영화를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분석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해석하게 하는 조건은 비가시적인 차원에 있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영화의 핵심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컷과 컷 사이에 있습니다. A컷 다음에 왜 B컷을 붙였느냐에 해석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 스토리에 주목해서 영화를 하나의 흘러가는 이미지로 보지만, 컷 간의 간격을 우리가 어떻게 이어붙이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해석할 때 작가의 의도를 찾거나 장면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지만 분석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창작자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창작자가 모든 컷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편집을 하면서도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지 자체만 봐서는 어떤 질문도 던질 수 없습니다. 나와 이미지 사이에도 간격이 있는데 이것을 메꾸기 위해서는 우리의 맥락을 갖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해석이란 내가 어떤 맥락 속에서 질문하고 그 컷의 이미지를 재배치시킬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3.텔레비전과 지각하는 방식

영화와 사진은 기술을 이용한 예술이 아니라 기술 자체입니다. 우리는 회화 시대가 아닌 기술과 예술이 구분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 지각장을 가장 크게 바꿔놓은 기술은 텔레비전입니다. 필름영화와 텔레비전은 둘 다 영상 이미지이긴 하지만 두 기술을 통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이미지를 만들고 전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필름으로 사진을 계속 찍고 그 이미지를 연결해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시간적 인과로 구성된 게 아니라 컷들을 어떻게 이어붙이느냐에 따라서 다른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반면에 텔레비전 이미지는 편집을 통해 우주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이미지를 바로 바로 각인을 시킵니다. 영화처럼 컷을 이어붙혀서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파로 영상을 바로 전달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는 영화처럼 컷들의 이음새를 맺구거나 다시 이어붙이히면서 다른 해석을 만들어 낼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 순서대로 찍힌 실시간 영상은 의심할 필요 없는 진실 그 자체가 됩니다. 재판의 과정에서도 실시간 촬영 영상은 가장 확실한 증거 자료가 됩니다.

텔레비전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송출됩니다. 아침에 뉴스에 나온 게 저녁 뉴스에도 나오고 광고들도 일정 기간을 동일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극적인 사건들도 계속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범상해져 버리고 어떤 사건도 똑같아 보입니다. 이미지들은 다양해진 것 같은데 이것이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된 것일까요? 실시간의 이미지를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을까요? 텔레비전이 외부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점령하고 그 이미지가 우리의 욕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더 많고 짜릿한, 욕망을 자극하는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이 속에서 이미지를 독해하는 시간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서 이미지의 평면은 더 납작해져 버렸고,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맥락에 대한 질문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미지에 대한 질문들을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 “새로운 질서에 관한 열두 가지 의견,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을 읽으시고, 흥미로운 질문을 중심으로 글을 써오시면 됩니다~
전체 1

  • 2019-06-20 12:03
    내가 뭘 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각하는 방식 자체에 의해 지각된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객관적인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상상적 인식인지. @.@
    니체의 말처럼 모든 것이 해석이군요!